지난 15일 금요일 밤 11시30분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남역 앞.손님을 기다리던 대리운전 기사 김영복씨(58)가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지금 막 제 PDA(개인용 휴대단말기)로 온 콜 신호를 잡았어요. 신촌 가는 손님인데 제가 찍었습니다. 운이 좋네요. 콜 신호잡기가 쉽지 않거든요. 오늘 잘 하면 한두 건 더 하겠는데요. "

운동화와 캐주얼 바지,긴팔 티셔츠 차림에 휴대폰과 PDA 두 대로 중무장(?)한 김씨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골목길 안으로 사라졌다. "콜을 누가 먼저 잡느냐,이게 관건이에요. "

퇴근길 술을 마신 뒤 귀가하는 자가 운전자들을 대신해 차를 모는 대리기사들 사이에 밤마다 '콜찍기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100m 달리기 승부가 0.01초 차이로 갈린다면,대리기사들의 '콜 잡기'는 0.001초 사이에 판가름 난다.


◆첨단장비 뒤처지면 끝장

대리기사들이 말하는 '콜(call)'이란 기사들이 들고 다니는 PDA나 휴대폰에 뜨는 고객정보(현 위치,행선지,요금,연락처)다. 손님 반경 500m나 2㎞ 등 정해진 범위 안에서 가장 먼저 콜을 터치하는 기사가 일감을 따낸다. 예스콜 대리운전 소속 박상훈씨(45)는 "초보일수록 콜을 못잡고 허둥대다 허탕만 친다"며 "콜을 얼마나 잘(빨리) 잡느냐가 대리운전 수입을 좌우한다"고 말했다.

이유는 이렇다. 대리운전 신청을 받은 콜센터 직원이 컴퓨터에 입력한 신청내역(오더)은 서버를 통해 손님 주변의 대리기사 PDA에 곧바로 자동 전송된다. 서버에서 단말기까지 신청내역이 전송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1~3초.이 시각 기사들은 PDA 화면의 '배차' 버튼을 가장 먼저 누르기 위해 눈을 부릅뜬다. 일부 기사들은 은박 테이프와 지우개 달린 연필 등을 이용해 인식률이 높은 터치펜을 직접 만들어 쓰기도 한다.

◆'콜 선점' 불법 프로그램도

부천 의정부 시흥 등 손님이 뜸한 외곽지역에서는 경쟁이 더 심하다. 고객을 먼저 '찜'하기 위해 PDA나 휴대폰을 4~5개씩 들고 다니는 기사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콜을 띄워주는 프로그램 이용료(단말기당 월 1만5000원) 부담이 크지만 빈 손으로 돌아오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

단말기를 최신 버전으로 바꾸는 것도 중요하다. 새 기종일수록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다. 단말기 속도를 측정하는 유틸리티도 덩달아 인기다. 이러다 보니 '대리기사 집결지'로 불리는 강남 교보타워4거리에는 스마트폰,PDA,자동프로그램,액세서리 등을 취급하는 천막(거리용품점)이 매일 밤 11시~새벽 1시에 줄지어 들어선다. 길석근 토마토대리운전 사장은 "오더가 전송되면 단말기에서 '딩~동'소리가 나는데,내 것은 '딩' 소리가 날 때 옆 사람 단말기에서는 벌써 '동' 소리가 울리면 얼마나 속이 터지겠느냐"고 반문했다.

요즘에는 신청내역이 전송되는 도중에 가로채는 불법 프로그램까지 나돌고 있다. 미리 입력한 조건에 맞는 콜을 모조리 자동 터치해주는 프로그램이다. 이용료는 월 2만~3만원 선.길 사장은 "신청내역 전송 도중에 정보를 가로채는 것은 콜센터 서버의 정보를 훔친 것이므로 불법"이라며 "하지만 0.001초에 생계를 걸어야 하는 대리기사들이 이런 유혹을 뿌리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경쟁은 '과속'…돈벌이는 '정체'

대리운전 시장의 첨단 경쟁은 스마트폰 등 통신기기 진화만큼이나 변화무쌍하지만 이면에는 대리기사들의 한숨 소리가 배어있다. 종전보다 콜 잡는 횟수는 늘어도 최신 장비나 프로그램 이용료 등을 내면 손에 쥐는 돈이 얼마 되지 않아서다. 특히 경력이 짧고 수입이 적은 대리기사일수록 이런 무한경쟁에 뛰어들 수밖에 없다. 대리기사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대리운전 업체는 현재 전국적으로 7000여곳,대리기사는 10만명을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경민 한국대리운전협회 부장은 "3년 전만 해도 하룻밤에 5~6콜 찍었지만 지금은 3~4콜 찍기도 어렵다"며 "대리운전 수요 증가는 정체된 반면 대리기사는 여전히 늘고 있어 출혈 경쟁은 더욱 심해질 것"으로 내다봤다.

이현일/강황식 기자 hiunea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