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깨나 낸다는 중년치고 독특한 체크무늬가 배합된 버버리 남방 한 벌쯤 없는 이가 있을까. 영국을 대표하는 브랜드이자 트렌치코트의 대명사인 버버리는 154년의 역사를 지닌 명품회사다. 버버리는 오랜 역사에만 안주해 변화를 거부하다 1990년대 들어 '아저씨용(用)'이라는 비아냥을 들을 만큼 긴 슬럼프를 겪었다. 버버리를 낡은 구닥다리 이미지로 여기는 소비자가 늘어났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세계 곳곳에서 '짝퉁'이 판치고 아시아 지역 매장에서는 '떨이 세일'까지 등장했다.

궁지에 몰린 버버리는 10여년 전부터 뼈를 깎는 쇄신을 시작했다. 이런 노력이 차츰 빛을 내기 시작했다. 버버리는 최근 전체 매출액이 전년 동기보다 17% 오른 상반기 실적을 발표했다. 하반기엔 전 세계 매장 숫자를 25% 늘리기로 하는 등 공격경영의 시동을 걸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지난 2년간 명품업체 매출이 평균 3~5% 떨어지는 와중에서도 버버리는 줄곧 증가세를 유지했다. 버버리의 부활은 이제 패션업계에서 교과서로 통한다.

◆콧대높던 자존심 버리고 "다 바꾸자"

지난달 30일 종료된 버버리의 상반기(2010년 4월~9월) 실적은 시장의 기대를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사업 분야와 전 세계 지역별로 매출이 골고루 늘어났다. 소매 부문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20%,도매는 17% 증가했다. 의류와 패션 잡화부문의 매출도 두 자릿수로 늘었으며 젊은 층을 위해 만든 '버버리 프로섬' 라인과 지난 7월 선보인 화장품 라인 '버버리 뷰티'도 성적이 좋았다.

버버리는 자신감을 완전히 회복한 모습이다. 스테이시 카트라이트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우리는 지역경제 상황과 관계 없이 지속적으로 성과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이 기세를 몰아 올해 투자 규모를 지난해보다 2배 이상 늘어난 1억3000만파운드로 책정했다.

버버리 회생의 중심에는 안젤라 아렌츠 최고경영자(CEO · 47)가 있다. 2006년 수장이 된 그는 버버리를 재건하기 위해 △고급 브랜드 보호(protect) △새로운 탐색(explore) △영감 부여(inspire)라는 세 가지 핵심가치를 내세웠다.

먼저 유통 방식부터 뜯어고쳤다. 버버리는 과거 직수입,도매,라이선스 등을 현지 업체에 일임해 왔다. 그런데 1990년대 일부 국가에서의 가짜 제조와 대량 세일 등으로 브랜드 가치가 급속히 떨어졌다. 버버리는 중앙집권 시스템을 가동시켜 디자인,판매,공급 체인을 직접 관리하겠다고 나섰다. 제품 유통과 라이선스까지 차례로 회수했다.

매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었던 패션쇼도 지난해부터는 영국 런던에서 개최한다. 버버리의 본고장인 런던으로 다시 가져온 것이다. 아렌츠 CEO는 지난 한 해 동안 전 세계 공장을 634차례 방문해 공정을 일일이 점검했으며 기준 미달인 매장 28곳을 개조했다.

◆가장 오래됐지만 가장 먼저 디지털화

버버리는 시대 변화에 둔감했던 것이 매출 하락의 주 원인이라고 분석하고 다양한 소재와 색상,새로운 디자인 등을 시도하며 브랜드 재탄생 작업에 착수했다. "명품의 주고객이던 베이비붐 세대가 물러남에 따라 새롭게 떠오르는 젊은층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였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은 분석했다.

버버리의 대명사격인 체크까지 과감히 버렸다. 체크무늬를 변형하거나 아예 쓰지 않았으며,기마상과 퀄팅 등을 현대적인 감각에 맞게 재창조했다.

파격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글로벌 첨단 디지털 경영에도 도전했다. 명품회사로는 처음으로 온라인 판매를 시작했다. 또 명품 브랜드 최초로 디지털 방식의 쌍방향 광고를 촬영했다. 자사 패션쇼를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뉴욕,파리,도쿄 등 5개 도시에서 3차원(3D)으로 생중계,아이폰과 아이패드 및 전 세계 300여개가 넘는 패션 관련 사이트에서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컬렉션 모습을 인터넷으로 낱낱이 공개한 것은 폐쇄적인 명품업계 최초의 시도였다.

지난해 11월엔 소셜 네트워크 기능이 있는 웹사이트 '아트 오브 더 트렌치'를 열어 소비자들이 트렌치코트를 입은 사진을 직접 올릴 수 있도록 했다. 아렌츠 CEO는 "버버리 브랜드가 갖고 있는 오래된 '스토리'의 힘을 믿었다"며 "젊은층들이 쉽게 접근해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홈페이지가 제격이라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버버리는 한국에서 트위터 계정을 가장 먼저 시작한 명품브랜드이기도 하다.

◆중국 등 신흥시장 공략만이 살 길

"버버리를 먹여살리는 것은 중국 부자"라는 우스개 말이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올해 중국에 10개 매장을 연 버버리는 앞으로 2년 내 중국 내 직영 매장을 100개로 늘릴 예정이다. 이를 위해 버버리는 최근 현지 협력업체에 일임했던 프랜차이즈 판권을 7000만파운드에 되사들였다. 이로써 중국 내 30개 도시의 50개 매장 소유권을 확보했다. 나머지는 신규 개점할 계획이다. 회사 측은 중국 판매 증가에 힘입어 내년과 내후년엔 2000만파운드의 영업이익을 올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중국 현지언론인 차이나데일리는 이와 관련,"지금까지 글로벌 명품업체들이 중국 내 유통업체와 합작법인을 설립해 자사 상품을 판매해 왔지만 중국 명품시장이 급속히 확대되자 수익을 독식하기 위해 직영 체제로 전환하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김정은 기자 likesmi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