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시퍼런 칼날' 밟고서도 뜻 꺾지 않은 개화사상가의 충절
"오호라! 사람의 태어남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는데 / 그 죽음이 진실로 마땅히 죽어야 할 자리에서 죽을 수 있다면 / 그 죽음은 도리어 사는 것보다 현명한 것이니 / 이는 서슬이 시퍼런 칼날을 밟고서도 / 자신의 목숨을 돌아보지 않았던 이유인 것이다. "

비장하면서도 추상 같은 이 절명시는 대한제국 말 충절의 선비였던 위당(韋堂) 안숙(安潚 · 1863~1910)의 작품이다. 1894년 진사시에 합격해 성균관 정5품 직강(直講)이 된 그는 신학문과 해외 유학에도 관심이 많았던 동도서기(東道西器)의 실학파 문인이자 개화사상가였다. 경술국치의 분노로 고향인 충북 괴산의 오랑강에 몸을 던져 순절했는데 《선비 안숙일지》는 그의 유고집이다.

기(記) · 설(說) · 시(詩) · 서(序)를 망라한 이 책은 1975년에 나온 《위당유고》의 완역본으로 33편의 정론과 산문,218편의 절구 · 율시가 영인본과 함께 실려 있다. 632쪽에 달할 만큼 두툼하다. 그의 현실 비판과 주체의식,애국사상뿐만 아니라 인간의 연분,청빈한 삶 등을 다룬 뛰어난 글들은 동시대인들에게 "충후하고 간결하면서 윤택하여 노두(老杜 · 두보)의 시사(詩史) 규칙이 진실로 거기에 들어 있다"는 찬사를 받았다.

"사물에 어찌 좀이 되었는가 / 가증스러우며 또한 가련하구나 /(중략) 한 해 내내 섬멸해도 없애기 어렵고 / 밤이 새도록 괴로워 잠을 못 자네 / 벌레 속의 못된 종류"라고 나라를 망친 집권층을 좀벌레에 빗대어 야유했다. 또 "지난해 3월 그대를 묻던 걸음 /(중략)백골은 땅속에서 흙이 되었을 것이지만 / 혼백은 말 머리의 영광(과거 합격)을 알 것이오"에서는 죽은 아내를 향한 애틋한 마음을 표현했다.

그는 실용적 개화파로서 일이만(日耳曼 · 독일)과 보로사왕국(普盧士王國 · 프러시아)의 신식 군대편제와 징모제도를 예로 들며 부국강병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명성황후가 왜적에게 변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해 스스로 '위당광부(韋堂狂夫)'라 칭하고 정기론(正氣論)을 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한 세기를 기다린 이 유고집이 한 가문만의 책일 수 없다. 현재를 사는 이들에게 의미 있는 춘추서가 될 것"이라는 위당의 손자 안병찬의 서문이 크게 와닿는 것은 비단 올해가 경술국치 100년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전장석 기자 sak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