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과장의 자리는 부장과 등을 지고 앉게 돼 있다. 그러다보니 얼굴 표정을 잘 보지 못한다. 하지만 부장의 말만 들어도 기분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 '김 과장'하고 부르면 뭔가 일에 착오가 생겼다는 신호다. '김◆◆씨'라고 부르면 상당히 깨져야 할 상황이라는 게 그의 경험이다. '어이,◆◆아'라고 이름을 부르면 상당히 기분좋은 상태다.

직장생활에서 '호칭'과 '말투'는 김 과장 이 대리들에게 무시할 수 없는 고민거리다. 아무리 어린 후배라도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는 김모 과장은 후배들로부터 "카리스마가 없다"는 평가를 듣는다. 친근감의 표현으로 자신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후배에게도 그냥 반말을 하는 이모 과장은 "싸가지가 없다"는 얘기를 듣곤 한다. 호칭과 말투에 따라 그 사람에 대한 직장 내 평판과 인상이 좌우되기도 한다.

◆누님은 되고 오빠는 안 되고

대기업 1년차 김모씨(26 · 여)는 성격이 털털하고 외모도 출중하다. 일도 잘하는 편이다. 일과 후 동기 · 선배들과도 잘 어울린다. 부서에서는 귀염둥이다. 그러던 어느날 술자리에서였다. 넉살좋은 남자 동기가 남자 선배에겐 '형님',여자 선배에겐 '누님'이라며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선배들도 기꺼이 받아줬다.

김씨도 괜찮은 호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시절 호칭을 떠올리며 한 남자 선배에게 '오빠'라고 불렀다. 순간 술자리는 급속히 냉랭해졌다. 무안을 당한 김씨는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았다. 한 여자 선배는 "오빠라고 부르면 남자들은 자기한테 관심있는 줄 착각한다"고 설명해 줬다.

국내 한 제약사에 근무하는 고모 대리(33)는 모든 선배들을 '형님'이라고 부른다. 필요할 때 '형님!'이라고 부르며 달라붙으면 웬만한 선배들은 그 부탁을 떨쳐내질 못한다. 하지만 고 대리는 "가끔씩 선배 부탁을 거절해야 할 때나 일이 맘대로 풀리지 않아 깨질 땐 사무적인 호칭을 쓰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고 말했다.

◆자기,그대,매니저…

직장 생활을 몇 년씩 한 여성들 중에는 동료들을 부르는 자기만의 호칭을 개발한 이들이 많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직원들을 사무적으로 '~씨'라고 부르기가 어색하기 때문이다.

대기업 박모 과장(37 · 여)은 본인보다 직급이 낮은 모든 이들에게 '자기'라고 부른다. 그는 "회사 생활이 빡빡하니까 좀 살갑게 구는 느낌을 주고 싶고,자연스럽게 반말을 쓸 수 있다"고 설명했다. IT기업에 다니는 배모 차장(39 · 여)은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하대할 때는 무조건 '그대'라는 호칭을 쓴다. "그대가 저번에 제안한 거 말이야"라든가 "그대는 역시 일처리가 똑 부러져"라는 식이다. 배 차장과 함께 일하는 한 직원은 "처음에는 굉장히 어색했는데 듣다보니까 은근히 상대를 높이는 것 같아 괜찮다"고 평가했다. 외국계 회사에선 '대리 · 계장 · 과장 · 차장 · 부장…' 등으로 이어지는 호칭 체계가 잘 작동하지 않는다. 무슨 매니저,디렉터,오거나이저,플래너,컨설턴트들이 이렇게 많은지.명함으론 그럴싸한데 도저히 뭐라고 불러야 할 지는 알 수가 없다. 이렇다보니 일부 외국계 회사들은 전 세계 공통인 회사 내 직급체계와 별도로 '한국 영업용' 호칭을 별도로 부여하기도 한다. 명함에 '김◆◆ 매니저(과장급)'라든가 '김◆◆ 과장(매니저)' 등으로 새기는 식이다.

◆갑자기 존대말을 쓰면 경계를

공기업 이모 대리(33)의 부장은 성격이 호방하다. 평소 이름을 부르고 농담을 자주한다. 부원들끼리 가까워져야 효율적으로 일을 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런 부장을 이 대리는 아주 좋아한다. 하지만 부장의 말투가 바뀌면 이 대리는 바짝 긴장한다. 부장이 갑자기 "이 대리,이리 좀 와보세요"라고 깍듯하게 존칭을 붙일 경우다. 십중팔구는 뚜껑이 열렸다는 반증이다. 부장은 부하직원들의 일처리가 맘에 들지 않을 경우 무조건 화를 내지 않는다. 대신 존칭을 또박또박 붙여가며 일일이 잘못을 지적한다. 큰소리치며 불같이 화내는 상사보다 훨씬 더 무섭다는 게 이 대리의 설명이다.

◆호칭의 정치학

대졸자와 고졸 · 전문대졸자 간에는 호칭 문제로 미묘한 갈등이 벌어지는 일이 잦다. 학력이 낮으면 먼저 입사했어도 승진이 늦어 나이와 직급이 일치하지 않는 역전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이모 대리는 31세다. 이 대리와 같은 부서에 일하는 박 주임은 올해 35세로 전문대를 나와 이 대리보다 3년 먼저 입사했다. 이 대리는 신입사원 시절부터 만난 오 주임을 존대하기 위해 '선배'라고 부른다. 오 주임은 이 대리를 '대리님'이라 부르면서 서로 존대말을 쓴다. 이 대리는 "얼마 전 술자리에서 후배가 왜 오 주임에게 선배라고 부르냐며 지적하더라"며 "오랫동안 선배라고 불러서 이제 와서 주임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어색해 고민스럽다"고 말했다.

때로는 '네편과 내편'을 가르는 꼬리표가 되는 것도 호칭이다. 건설회사에 경력직으로 입사한 김모 과장(38).이직한 지 2년이 다 돼가지만 아직도 팀에서 겉돈다는 느낌이다. 팀장은 부하 직원을 대하는 게 사람마다 달랐다. 15명의 부하직원들 중 어떤 사람은 직함을 뺀 채 이름을 그냥 불렀다. 어떤 직원은 꼬박꼬박 직함을 붙여 불렀다. 특히 두 명에겐 술자리에서 '자식','임마'를 섞는 등 편하게 대하는 티가 도드라졌다. 그러나 그에게는 여전히 과장 호칭과 존대말이 꼬박꼬박 따라왔다.

그는 최근에야 사정을 파악했다. 그 회사엔 임원부터 말단 직원끼리 특정부서 공채출신끼리 뭉치는 '조직 속 조직(이너서클)'이 있었다. 정기적으로 술도 먹고 인사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저 경력직이라서 시간이 걸리겠거니 했던 그가 순진했던 셈이다.

◆뒷담화 호칭의 세계

김 과장,이 대리들이 뒷담화를 할 때 상대방을 부르는 호칭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남자 상사에게 '예은'처럼 여자 이름을 붙이는 방법,'그녀'나 '그' 처럼 애매모호하게 표현하는 방법은 기본이다. 비속어로 칭하기도 하고,반어법 억양을 살려 '오빠'나 '누나'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 상사의 외모나 성격을 동물에 빗대 표현하기도 한다.

증권사 최모 과장(37)은 별명 짓기의 달인이다. 그는 성질이 더러운 상사에게는 '멍멍이',여기저기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며 감 놔라 배 놔라 간섭하는 배불뚝이 상사에겐 '맹꽁이',공주병에 걸린 데다 제때 일을 마무리짓지 못하고 남에게 피해주는 여직원은 '언년이'라고 부른다. 비전도 없고 일도 안하고 머리도 나쁜 상사에게는 '닭'이란 호칭을 붙여준다. 최 과장은 "뒷담화용 호칭을 따로 붙이긴 하지만 회사 사람들끼리 사적인 모임에서 나눴던 뒷담화는 상사에게 흘러 들어갈 여지가 있어 수위 높은 욕설은 자제한다"고 말했다.

김동윤/이관우/이상은/강유현 기자 oasis93@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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