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2일 경주에 모인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 · 중앙은행 총재들이 환율전쟁을 잠재우기 위한 해법으로 코뮈니케(공동성명서)에 담은 핵심 중 하나가 '시장 결정적 환율제'였다. 환율이 시장에 의해 결정되도록 하자는 것으로,다시 말해 정부의 인위적 개입을 최소화하자는 약속이었다.

하지만 불과 열흘도 지나지 않아 약속은 무위로 돌아갈 운명에 처했다. 일본이 '슈퍼 엔고' 저지를 위해 추가로 시장 개입에 나설 움직임인 데다 미국도 2,3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를 열어 대규모 2차 양적완화에 돌입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정부 관계자는 "경주 코뮈니케의 잉크가 채 마르기 전에 합의가 무의미해질 위기에 처했다"며 "환율대전이 다시 불붙을 조짐"이라고 말했다.

◆다소 느슨한 합의

경주 선언에 명기된 '시장 결정적 환율제'는 지난 6월 토론토 G20 정상회의에서 합의한 '시장 지향적 환율제'에 비해 한 단계 진전된 것은 분명하다. 학계도 인정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시장 지향적'이란 말은 각국이 시장의 방향을 존중하는 선에 머물자는 것인 데 비해 '시장 결정적'은 환율 개입국에 대한 경고 의미가 들어간 것"이라며 "과거보다 훨씬 센 표현"이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시장 반응은 시큰둥했다. 각국이 통화가치 절하를 위해 다양한 형태로 시장 개입에 나서고 있는 현실에서 선언적인 구호가 과연 먹힐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게 대다수의 반응이었다. '시장 결정적 환율제'를 어길 경우 규제 수단도 마땅치 않다는 점에서 구속력을 갖기에 뭔가 부족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각국의 동상이몽

경주 선언문에 대한 각국의 입장도 각양각색이었다. 9월 중순 대규모 외환시장 개입에 나섰던 일본은 경주회의 직후 별다른 입장 변화가 없었다.

노다 요시히코 일본 재무상은 경주회의가 끝난 뒤 일본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시장 동향을 봐가며 필요할 때에는 단호한 조치를 취한다고 하는 일본의 자세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해 상황 전개에 따라 추가 시장 개입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했다.

캐나다 역시 달러 약세에 맞서 시장 개입에 나설 수 있다는 뜻을 내비쳤다. 마크 카니 캐나다 중앙은행 총재는 "캐나다 달러가 지속적인 강세를 보여 경제 성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만약 필요하다면 (외환시장) 상황을 통제하기 위한 선택을 고려하겠다"고 말했다.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은 미국의 2차 양적완화를 겨냥해 "유동성을 늘리는 미국의 정책은 환율을 간접적으로 조작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맞서 미국은 "디플레이션을 피하고 경기를 살리기 위해 추가 양적 완화가 불가피하다"며 달러화의 인위적 하락을 노린 것은 아니라고 방어했다.

◆갈수록 중요성 커지는 서울회의

휴전 상태에 들어갔던 환율전쟁이 재발할 움직임을 보임에 따라 오는 11일 열리는 G20 서울 정상회의 역할이 더 커지게 됐다. 당초 환율 문제는 경주 재무장관 · 중앙은행 총재 회의에서 원칙에 대한 대타협이 이뤄졌기 때문에 서울 정상회의는 추가 논의 없이 경주선언문을 추인하는 성격이 짙었다.

하지만 경주 환율합의가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높아짐에 따라 서울 정상회의에서 환율에 대한 추가 논의가 불가피해졌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이날 "'시장 결정적 환율'에 대해 경주에서 합의된 것 이상으로 구체적인 내용까지 정하기는 어렵지만 합의문이 구속력을 가질 수 있도록 뭔가를 덧붙이는 내용이 추가로 논의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정종태/서욱진 기자 jtchung@hankyung.com

◆ 시장 결정적 환율제

기존 '시장 지향적(market oriented)'이라는 표현보다 시장의 역할을 더 강조했다. '시장의 기능이 흐트러지지 않게 가급적 개입을 자제하자는 것'에서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자는 것'으로 시장의 역할을 더 강조했다. 펀더멘털(내재가치)에 비해 지나치게 자국 통화 가치를 낮게 유지하는 환율 개입국에 대한 경고 의미도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