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3월25일 당시 신상훈 신한금융지주 상무는 신한은행장으로 취임했다. 2009년 3월엔 신한금융 사장으로 승진했다. 신한금융 안팎에서 '포스트 라응찬'으로 인식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내분사태로 신 사장은 2인자 자리를 사실상 내놓았다. 이번 내분사태가 다분히 후계구도를 둘러싼 권력다툼에서 초래된 만큼 이번 기회에 주인없는 은행의 후계양성 시스템을 구체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신한금융에 라응찬 전 회장의 후계자로 꼽히던 사람은 많았다. 라 전 회장의 뒤를 이어 신한은행장을 맡았던 이인호 전 신한금융 사장이 우선 꼽혔다. 하지만 2003년 최영휘 신한금융 부사장이 사장으로 승진하면서 2인자 자리를 최 사장에게 넘겨줘야 했다.

하지만 고작 2년이었다. 최 사장은 2005년 5월17일 이사회에서 해임당했다. 이런 저런 얘기가 나왔지만 라 전 회장의 자리를 넘본 것이 화근이었다는 게 정설이다. 뒤를 이어받은 사람이 신 사장이다. 신 사장도 '최영휘 해임사건' 이후 5년4개월 만에 터진 내분사태로 진정한 후계자가 아니었음이 드러났다.

이들 외에도 한동우 · 고영선 전 신한생명 사장,홍성균 전 신한카드 사장 등이 한때 '포스트 라응찬'으로 꼽혔다. 현재 차기 신한금융 최고경영자(CEO)후보로 거론되는 사람들이다. 한 전직 시중은행장은 "라 전 회장이 확실한 후계구도를 설정해 놓았더라면 아무리 말못할 사정이 있었더라도 최악의 사태를 빚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신한금융만이 아니다. 주인 없는 국내 은행 대부분 CEO가 후계자를 키우지 않았다. 자신의 임기연장에만 급급했다. 합병 국민은행의 김정태 · 강정원 전 행장도 그랬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회장과 행장이 바뀌었던 우리금융지주와 우리은행은 말할 것도 없다.

예외는 있다. 하나은행이다. 윤병철 한국FP협회장은 1991년부터 하나은행장을 지낸 뒤 1997년 김승유 전무(현 하나금융지주 회장)에게 행장 자리를 물려줬다. 김 회장도 그런 적이 있다. 2000년대 초 비공식적으로 사퇴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이사들의 반대로 없던 일이 됐다.

그런 김 회장도 내년 3월 임기를 앞두고 후계자를 찾지 못한 눈치다. 한 관계자는 "찾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찾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미국 씨티그룹 이사회 산하에는 '추천 및 지배구조 위원회'가 있다. CEO후보를 발굴해 추천하고 매년 CEO 승계계획을 이사회에 보고하는 것이 주된 임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CEO를 찾지 못해 홍역을 치른 씨티그룹이 작년 1월부터 도입한 제도다. 국제 은행감독기구인 바젤은행감독위원회(BSBC)도 최근 이사회가 적절한 승계 계획을 마련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한 관계자는 "국내 은행들도 이제 후계양성 시스템을 명문화해 도입할 필요가 있다"며 "현직 CEO가 후계자를 양성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하영춘 기자 ha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