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창근 칼럼] 위기의 MB노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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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프렌들리 초심 살려야…포퓰리즘 최대 피해자는 결국 서민
감세(減稅)정책을 둘러싼 한나라당 내 논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처음 문제를 제기한 측은 '부자 감세' 철회야말로 서민을 위한 길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한발 더 나아가 소득세와 법인세 최고세율 구간을 신설해 세금을 더 걷어야 한다는 의원들도 적지 않다. MB노믹스의 상징이 집권 여당 내부에서부터 흔들리고 있는 꼴이다.
서민을 앞세운 노선투쟁은 앞으로 더 격화될 것이다. 친서민과 중도실용,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공정 사회 등의 구호가 갖는 함의(含意)에 대한 치밀하고 정교한 분석이 결여된 채 거칠게 밀어붙이면서 포퓰리즘으로 변질될 때부터 이미 예고된 일이다. 감세 철회 주장만 그런 게 아니다. 홍준표 한나라당 서민특위 위원장이 "보수 포퓰리즘 한번 해보자"며 들고 나온 '은행이익 10% 서민대출',안상수 당 대표의 '전 국민 70% 복지' 등도 마찬가지다.
'부자'라는 낙인(烙印)의 위력은 참으로 무섭다. '부자 정권''부자 정당'이라는 말 한마디가 다수 국민들이 정권에 등 돌리게 하고 한나라당에는 표 떨어지는 소리다. 야당의 이 절묘한 편가르기 구호를 여당 의원이 그대로 베껴 '부자 감세'를 없던 것으로 되돌리자고 한다. 1년 반이나 남은 19대 총선에서의 패배에 대한 두려움으로 어떻게든 부자의 딱지를 떼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진짜 친서민은 무엇인가. 서민은 누구를 말하고 부자와 서민계층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가. 형편이 넉넉지 못한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서민이라고 한다. 하지만 홍준표식 구분법으로 본다면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국민의 80%가 생활에 힘들어 하는 자칭 서민이다. 그들이 모두 서민일까. 아니면 안상수식 복지 대상인 70%의 국민이 서민인가.
그나마 통계적으로 의미를 갖는 소득의 중간점 이하,또는 평균소득에 못 미치는 계층이 서민이라는 잣대를 적용하더라도 여전히 모호하다. 소득기준에 약간 모자라는 서민과,간발의 차이로 그 기준을 겨우 넘어서는 서민 아닌 계층에 다른 무엇이 있을까. 그런 이분법으로 나눠 한쪽을 정책 수혜 대상으로 삼는다면 그보다 불공정한 일도 없다. 결국 정책의 대상조차 확실히 가늠할 수 없다는 얘기다. '친서민'이 필연적으로 포퓰리즘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명박 정부 출범 초의 최우선 가치는 '실용'이었다. 명분과 이념은 버리고 효율과 실익을 추구하는 시장경제를 꽃피워 일자리를 더 많이 만들어 내고 나라의 부(富)를 늘리기 위한 행동규범이다. 키워드는 기업부터 잘되게 해 곳간에서 인심나듯 전체 국민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자는 '비즈니스 프렌들리'였다. 그 상징적 정책이 바로 가계와 기업의 세금부담을 줄여 구매력을 키움으로써 소비를 진작하고,기업은 자본을 더 쌓아 투자와 생산이 확대되도록 한다는 감세인 것이다. 그럼으로써 중장기적으로 경제성장의 선순환 구조를 이끌어내는 효과도 이미 실증된 상식이다. '친기업'의 의미 또한 그것이었다.
문제는 의도와는 달리 친서민이 결국 친기업의 부정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포퓰리즘 바람이 불면 실용주의가 설땅을 잃는 것은 당연하다. 그건 이 정부의 오류다. 친서민이나 친기업 모두 한쪽으로의 쏠림을 의미하는 편가르기 구호인 까닭이다. 정책의 대상에 친소(親疏)가 있을 수 없고,'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功利)주의에 기반을 둬야 할 정책이 어느 한쪽을 위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면 다른 쪽의 반발은 필연적이다. 불필요한 갈등을 불러 일으키고 정책은 실패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래저래 MB노믹스의 위기다. 걱정스러운 것은 친기업이 실종된 친서민이 가져올 결과다. 실패가 예정된 포퓰리즘 정책의 가장 큰 피해자는 그 정책이 보살피겠다는 바로 그 '서민'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추창근 논설실장 kunny@hankyung.com
서민을 앞세운 노선투쟁은 앞으로 더 격화될 것이다. 친서민과 중도실용,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공정 사회 등의 구호가 갖는 함의(含意)에 대한 치밀하고 정교한 분석이 결여된 채 거칠게 밀어붙이면서 포퓰리즘으로 변질될 때부터 이미 예고된 일이다. 감세 철회 주장만 그런 게 아니다. 홍준표 한나라당 서민특위 위원장이 "보수 포퓰리즘 한번 해보자"며 들고 나온 '은행이익 10% 서민대출',안상수 당 대표의 '전 국민 70% 복지' 등도 마찬가지다.
'부자'라는 낙인(烙印)의 위력은 참으로 무섭다. '부자 정권''부자 정당'이라는 말 한마디가 다수 국민들이 정권에 등 돌리게 하고 한나라당에는 표 떨어지는 소리다. 야당의 이 절묘한 편가르기 구호를 여당 의원이 그대로 베껴 '부자 감세'를 없던 것으로 되돌리자고 한다. 1년 반이나 남은 19대 총선에서의 패배에 대한 두려움으로 어떻게든 부자의 딱지를 떼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진짜 친서민은 무엇인가. 서민은 누구를 말하고 부자와 서민계층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가. 형편이 넉넉지 못한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서민이라고 한다. 하지만 홍준표식 구분법으로 본다면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국민의 80%가 생활에 힘들어 하는 자칭 서민이다. 그들이 모두 서민일까. 아니면 안상수식 복지 대상인 70%의 국민이 서민인가.
그나마 통계적으로 의미를 갖는 소득의 중간점 이하,또는 평균소득에 못 미치는 계층이 서민이라는 잣대를 적용하더라도 여전히 모호하다. 소득기준에 약간 모자라는 서민과,간발의 차이로 그 기준을 겨우 넘어서는 서민 아닌 계층에 다른 무엇이 있을까. 그런 이분법으로 나눠 한쪽을 정책 수혜 대상으로 삼는다면 그보다 불공정한 일도 없다. 결국 정책의 대상조차 확실히 가늠할 수 없다는 얘기다. '친서민'이 필연적으로 포퓰리즘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명박 정부 출범 초의 최우선 가치는 '실용'이었다. 명분과 이념은 버리고 효율과 실익을 추구하는 시장경제를 꽃피워 일자리를 더 많이 만들어 내고 나라의 부(富)를 늘리기 위한 행동규범이다. 키워드는 기업부터 잘되게 해 곳간에서 인심나듯 전체 국민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자는 '비즈니스 프렌들리'였다. 그 상징적 정책이 바로 가계와 기업의 세금부담을 줄여 구매력을 키움으로써 소비를 진작하고,기업은 자본을 더 쌓아 투자와 생산이 확대되도록 한다는 감세인 것이다. 그럼으로써 중장기적으로 경제성장의 선순환 구조를 이끌어내는 효과도 이미 실증된 상식이다. '친기업'의 의미 또한 그것이었다.
문제는 의도와는 달리 친서민이 결국 친기업의 부정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포퓰리즘 바람이 불면 실용주의가 설땅을 잃는 것은 당연하다. 그건 이 정부의 오류다. 친서민이나 친기업 모두 한쪽으로의 쏠림을 의미하는 편가르기 구호인 까닭이다. 정책의 대상에 친소(親疏)가 있을 수 없고,'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功利)주의에 기반을 둬야 할 정책이 어느 한쪽을 위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면 다른 쪽의 반발은 필연적이다. 불필요한 갈등을 불러 일으키고 정책은 실패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래저래 MB노믹스의 위기다. 걱정스러운 것은 친기업이 실종된 친서민이 가져올 결과다. 실패가 예정된 포퓰리즘 정책의 가장 큰 피해자는 그 정책이 보살피겠다는 바로 그 '서민'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추창근 논설실장 kunn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