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업 H공사의 L과장(38)은 2006년 10월 가입한 퇴직연금만 생각하면 흐뭇하다. 2008년 금융위기 때 원금 평가손이 나기도 했지만 지난해부터 증시가 회복돼 4년간 누적수익률이 42.3%(연 평균 10.4%)에 달하기 때문이다.

L과장은 매달 33만원씩 적립하고 이 중 40%(13만원)를 국내외 주식에 분산투자하는 확정기여(DC)형 퇴직연금에 가입했다. 처음에는 주저했지만 컨설팅업체를 통해 충분한 설명을 듣고난 뒤 마음을 바꿨다. 그는 "소중한 퇴직금을 실적배당금으로 굴린다는 불안감이 없지 않았지만 장기 분산투자로 성과를 내 예전 퇴직금보다 훨씬 낫다"고 말했다.

퇴직연금이 도입된 지 5년이 지나면서 H공사처럼 성과를 보는 사례가 속속 나오고 있다. 손성동 미래에셋퇴직연금연구소 연구실장은 "퇴직연금 도입 우수 기업들은 노사가 함께 퇴직연금의 본질과 특징을 제대로 이해해 기업이 어떻게 활용하면 최대한 효과를 볼지 고민하고 그 결과를 반영했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연금사업자 선정 시 공정성 중요

패션의류업체 한섬은 2007년 7월 DC형 퇴직연금을 도입했다. 초기에 근로자는 물론 관리자들조차 퇴직연금에 대해 잘 몰랐다. 담당부서는 퇴직연금 도입에 대한 논리를 개발해 설명회를 통해 경영진과 근로자의 이해도를 높이는 데 주력했다. 한섬 인사부 관계자는 "퇴직연금 사업자 선정 시 경영진과의 친분이나 대출,수수료 등 부가서비스보다는 사업자의 시스템과 업무능력을 최우선으로 고려했다"고 말했다.

한섬은 퇴직금 적립률을 법정 최저적립률(연봉의 12분의 1=8.3%)보다 1.5배 이상 높은 12.49%로 정했다. 임금 인상률이 7~8%에 이르는데 최저적립률을 적용할 경우 근로자의 퇴직금이 줄어들 수도 있어 이를 방지하기 위해 경영진이 결단을 내린 것이다.

임직원이 1600명인 H공사는 운용에서 성공적인 모델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지속적인 근로자 교육과 운용컨설팅을 통해 확정급여(DB)형에서 DC형으로 전환이 늘고 있다. 도입 초기 DC형을 선택한 근로자는 138명에 불과했지만 현재 412명으로 증가했다. 처음부터 DC형에 가입해 4년간 운용한 근로자의 연 평균 수익률은 10.4%,1년간 DB형에 가입하다 DC형으로 전환한 근로자는 9.5%의 성과를 내고 있다. 이 회사 연평균 임금상승률(5%)의 2배 수준이다.

2008년 2월 DC형 퇴직연금을 도입한 미국계 컨설팅업체 M사는 도입 목적을 유능한 인재 확보와 장기근속 유도에 두고 근속 기간별로 퇴직연금 적립률을 차등 적용하고 있다.

근속연수에 따라 △3년 이하 9% △4~5년 10% △6~10년 11% △11년 이상 12%로 적용해 장기근속자일수록 유리하게 했다. 이에 따라 근로자 만족도가 높아져 이직률은 떨어지면서 장기근속자가 늘어나는 효과를 내고 있다.

글로벌 컨설팅업체 타워스왓슨의 장중식 이사는 "근로자 퇴직급여가 장기적으로 어떻게 변하는지를 따져 노사가 적립 비율 결정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노 · 사 · 정이 함께 나서야

퇴직연금이 도입 취지에 걸맞은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노사와 정부가 함께 나서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삼성생명 관계자는 "노사협상은 대개 서로 이해가 상충돼 대립과 갈등을 유발하는 경우가 많지만 퇴직연금은 노사가 윈윈하는 대표적인 협상 의제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퇴직연금이 기존 퇴직금 제도에 비해 근로자의 수급권을 보장해 근로자에게만 유리한 제도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퇴직연금 제도는 사용자 측에도 적지 않은 장점이 있다는 설명이다.

기업 입장에서 퇴직연금은 무엇보다 법인세를 줄이는 좋은 절세 방법이 된다. DC형은 퇴직연금 부담금 전액을,DB형은 퇴직급여 추계액 한도 내에서 손비 인정을 해주기 때문이다. DB형에 가입하면 퇴직연금을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추가 수익도 기대할 수 있다.

또 퇴직연금은 매년 발생하는 퇴직부채 비율을 개선할 수 있다. 이는 기업 재무건전성을 향상시키고 퇴직금 체불에 따른 민 · 형사책임 등 법적 위험도 해소할 수 있다. 이외에 퇴직연봉제,성과주의 임금제도 등 변화하고 있는 인사노무 환경에도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제도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퇴직연금은 근로자에게는 수급권 보장과 안정적인 노후생활이,경영자에게는 재무건전성 제고와 법인세 절감이 가능한 효율적인 제도"라며 "노사가 적극 나서 각 사업장 실정에 가장 적합한 퇴직연금 유형을 선택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서정환/강동균 기자 ceose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