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초 · 중반 조선은 국내외적으로 전환기적 위기상황에 직면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피해는 참혹했다. 연이은 흉년까지 겹쳐 경신대기근(1670~1671) 때는 총인구의 약 10%인 100만명이 사망했다고 《조선왕조실록》은 전한다.

이런 상황은 국가의 재정문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재정과 세금 가운데 절반 이상을 차지했던 공물 · 진상은 백성들의 담세 능력과 무관하게 막대한 경제적 부담을 지우면서 큰 사회문제로 대두됐다. 조정 안팎에선 개혁 논의가 무성했다. 중심 주제는 민생과 국가재정 문제였고,이 둘은 다시 공물 변통 문제로 귀결됐다.

공물 변통의 궁극적 목표는 토지 수익에 따른 균등 과세였다. 불합리하고 부당한 과세제도 아래에서 오랫동안 큰 이익을 본 기득권층은 강력히 저항했다. 하지만 조선은 17세기 중반 결국 재정개혁에 성공했다. 효종 때 본격적으로 실시된 대동법이었다.

《대동법,조선 최고의 개혁》은 선조,인조,효종,현종 시절에 진행된 왕과 관료의 논의를 생생하게 보여주면서 대동법이 수립 · 시행되는 과정을 복원한다. 대동법에서 가장 중요한 문헌인 '대동사목(大同事目)'을 치밀하게 분석한 저자는 "조선 500년 역사에서 대동법은 최대 · 최고의 개혁이었다"고 평가한다. 전국적으로 실시되기까지는 100년이 걸렸지만 애초 논의는 연산군 시절 틀어진 제도와 구조를 바로잡는 데서 시작했고 율곡 이이의 수미법(收米法) 제안으로 본격화된 200년의 개혁이었다는 것이다.

대동법을 '조선시대에 공물(貢物 · 특산물)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납세제도'로만 알고 있는 상식의 허점도 지적한다. 공물을 부과하는 기준이 호(戶 · 세대)에서 전결(田結 · 논밭에 물리는 세금)로,수취 수단이 현물에서 쌀과 피륙으로 바뀐 것은 대동법이 성립될 당시 이미 널리 퍼져있던 관행이었다는 것.저자는 "대동법을 주장했던 당시 정책 담당자들은 폐습이 사(私 · 민간)에서 비롯됐어도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제도가 필요하다고 믿었고 그 결과 나타난 것이 바로 대동법"이라고 설명한다.

'한눈에 보는 대동법 설립과정' '용어설명',호서 · 전남 · 영남 대동사목을 서로 비교해 볼 수 있는 '대동사목 내용 색인',주요 인물을 정리한 인명록과 인물사전 등 일반 독자를 위한 배려가 세심하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