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친정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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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에너지 원천은 친정어머니다. 내 외모나 성격이 어머니와 무척 닮은 데다 목소리마저 비슷해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더 각별한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 퇴임하신 아버지는 군 제대 후 첫 부임지인 전남 해남에서 집배원 아저씨의 중매로 어머니를 만나 결혼하셨다. 1967년 겨울 아버지가 받은 월급 1만3000원과 수저,밥그릇 두 벌로 신혼살림을 시작하셨는데 지독히 가난했지만 행복했다고 회고하신다.
어머니는 참으로 알뜰하고 부지런하신 분이다. 산더미 같은 집안일을 도깨비방망이로 뚝딱 요술이라도 부린 듯 순식간에 해내곤 하셨다. 삼남매에겐 엄하지만 자상하셨고,아버지께는 최고의 아내였으며 작고하신 조부모님께는 정말 효부셨다. 농사일에 바쁘신 조부모님 새참 시간에 맞춰 이것저것 솜씨 좋게 만든 뒤 막걸리까지 한 되 받아 시외버스 타고 고흥까지 한걸음에 달려가시곤 했던 기억이 새롭다.
아버지의 박봉으로 삼남매를 반듯하게 키우시느라 노심초사하셨던 어머니의 모습은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아버지 월급날 밤이면 동네 구멍가게 외상값에 할아버지 약값에 뻔한 월급을 이리저리 쪼개시며 한숨짓기도 하셨고,비 오는 날이면 커다란 고무통에 빗물을 받아 빨래,청소를 하시며 수돗물을 아끼셨다.
어머니를 따라 목욕탕에 가면 왜 그리 먹고 싶은 게 많았던지.빠듯한 살림에 아이스크림 하나도 선뜻 못 사주셨던 어머니 심정도 모르고 징징거렸던 철없던 내 어린 날을 되돌아보면 지금도 볼이 달아오른다. 이 얘기는 가족들이 잘 알고 있다. 투정을 가끔 부리는 두 딸들에게 한마디 하려고 하면 "엄마,외할머니랑 목욕 갔는데 아무것도 안 사주신 얘기 또 하시려고요?" 라고 선수 쳐서 나를 웃게 만든다.
어머니는 30년이 넘는 경력의 문인화가로 활동하고 계신다. 남도문인화의 대가 의제 허백련 선생의 맥을 잇는 광주 연진미술원 5기생이다. 내가 초등학생이었던 시절 그림에 대한 열병을 앓으셨고 결국 왕복 네 번의 버스비도 아껴 걸어 다니시며 꿈을 향해 발을 내디디셨다. 붓 한 자루도 맘 놓고 사기 어려웠던 형편이라 닳아서 낡은 붓에 아버지가 철사를 동여매 주시기도 했다. 어머니의 분신처럼 화순 어머니 화실에 걸려 있는 그 붓을 볼 때마다 가슴 한쪽이 아려온다. 어머니는 피나는 노력과 집념으로 마침내 꿈을 이루셨고 지금은 국전 초대작가로,광주전남 문인화 협회 상임이사로 제자들에게 당신의 꿈을 전파하고 계신다. 어머니는 그렇게 지독하게 열심히 살아오셨고 지금은 어머니를 꼭 닮은 내가 딸들에게 그 시절을 말하며 살고 있다. 무엇하나 풍족한 것 없고 힘들었지만 어머니는 늘 밝고 긍정적이셨고,삶에 대한 태도도 적극적이시다.
대학 졸업 후 곧장 뛰어든 정치의 세계에서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20여년간 좌절하고 힘들어 할 때마다 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신 어머니를 정말 존경하고 사랑한다. 그래서 '어머니'라는 이름은 내겐 언제나 가슴이 뭉클해지고 벅차오르는 그 무엇이고 내 힘의 원천이다.
김유정 < 민주당 국회의원 kyj207@assembly.go.kr >
어머니는 참으로 알뜰하고 부지런하신 분이다. 산더미 같은 집안일을 도깨비방망이로 뚝딱 요술이라도 부린 듯 순식간에 해내곤 하셨다. 삼남매에겐 엄하지만 자상하셨고,아버지께는 최고의 아내였으며 작고하신 조부모님께는 정말 효부셨다. 농사일에 바쁘신 조부모님 새참 시간에 맞춰 이것저것 솜씨 좋게 만든 뒤 막걸리까지 한 되 받아 시외버스 타고 고흥까지 한걸음에 달려가시곤 했던 기억이 새롭다.
아버지의 박봉으로 삼남매를 반듯하게 키우시느라 노심초사하셨던 어머니의 모습은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아버지 월급날 밤이면 동네 구멍가게 외상값에 할아버지 약값에 뻔한 월급을 이리저리 쪼개시며 한숨짓기도 하셨고,비 오는 날이면 커다란 고무통에 빗물을 받아 빨래,청소를 하시며 수돗물을 아끼셨다.
어머니를 따라 목욕탕에 가면 왜 그리 먹고 싶은 게 많았던지.빠듯한 살림에 아이스크림 하나도 선뜻 못 사주셨던 어머니 심정도 모르고 징징거렸던 철없던 내 어린 날을 되돌아보면 지금도 볼이 달아오른다. 이 얘기는 가족들이 잘 알고 있다. 투정을 가끔 부리는 두 딸들에게 한마디 하려고 하면 "엄마,외할머니랑 목욕 갔는데 아무것도 안 사주신 얘기 또 하시려고요?" 라고 선수 쳐서 나를 웃게 만든다.
어머니는 30년이 넘는 경력의 문인화가로 활동하고 계신다. 남도문인화의 대가 의제 허백련 선생의 맥을 잇는 광주 연진미술원 5기생이다. 내가 초등학생이었던 시절 그림에 대한 열병을 앓으셨고 결국 왕복 네 번의 버스비도 아껴 걸어 다니시며 꿈을 향해 발을 내디디셨다. 붓 한 자루도 맘 놓고 사기 어려웠던 형편이라 닳아서 낡은 붓에 아버지가 철사를 동여매 주시기도 했다. 어머니의 분신처럼 화순 어머니 화실에 걸려 있는 그 붓을 볼 때마다 가슴 한쪽이 아려온다. 어머니는 피나는 노력과 집념으로 마침내 꿈을 이루셨고 지금은 국전 초대작가로,광주전남 문인화 협회 상임이사로 제자들에게 당신의 꿈을 전파하고 계신다. 어머니는 그렇게 지독하게 열심히 살아오셨고 지금은 어머니를 꼭 닮은 내가 딸들에게 그 시절을 말하며 살고 있다. 무엇하나 풍족한 것 없고 힘들었지만 어머니는 늘 밝고 긍정적이셨고,삶에 대한 태도도 적극적이시다.
대학 졸업 후 곧장 뛰어든 정치의 세계에서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20여년간 좌절하고 힘들어 할 때마다 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신 어머니를 정말 존경하고 사랑한다. 그래서 '어머니'라는 이름은 내겐 언제나 가슴이 뭉클해지고 벅차오르는 그 무엇이고 내 힘의 원천이다.
김유정 < 민주당 국회의원 kyj207@assembly.g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