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드시지요. 저는 이제 오랜 번민을 끝내려 합니다. 마음 한 번 주시지 않으니 미움이 커서 끝내려 합니다. 허나 오랜 번민을 끝내려니 하나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손수 밥 한 끼 올리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들어주십시오."

드라마 '대장금'에서 장금의 라이벌이자 연적인 금영이 오랜 세월 짝사랑하던 민정호를 마음에서조차 떠나 보내기로 작정한 다음 마지막으로 그에게 직접 차린 상을 내밀며 하는 대사다. 개인적으로 그간 접했던 책과 영상물 가운데 기억하는 최고의 이별 장면이다.

사랑은 움직인다. 달라진 여건이 마음을 바꿔 놓기도 하고,세월이 상대의 단점과 결점을 들춰내기도 한다. '김치가 맛이 없다. 사랑이 식은 게지'라는 광고문구가 있었지만 사랑은 관심인 동시에 집중이다.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지고 이런저런 남의 말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사랑은 저문다. 입맛은 그 다음이다.

헤어지는 데 계절이 따로 있을 리 없겠지만 그래도 이별이 좀더 잦아지는 때가 있다는 소식이다. 영국의 언론인이자 그래픽 디자이너인 데이비드 매캔들레스가 세계 최대 소셜 네트워킹 사이트인 페이스북 홈페이지를 중심으로 살펴 봤더니 시기적으론 밸런타인 데이 직후와 봄 방학 전,크리스마스 2주 전,요일로는 월요일에 이별하는 사람이 많더란 것이다.

우리의 경우는 어떤지 모르지만 명절 이후 이혼이 급증한다는 걸 보면 동서양 할 것 없이 무슨무슨 날이라는 게 화근인 모양이다. 봄 방학 전 이별이 느는 건 새로운 기회를 앞두고 묵은 관계를 정리하려 들기 때문인 것 같다는데 그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남자가 군 복무 중 여자가 배신,헤어졌던 예전과 달리 요즘엔 입대를 앞둔 남자 쪽에서 먼저 이별을 고하는 일이 많다는 까닭이다. 무슨무슨 날이나 기념일 이후에 이별이 늘어나는 건 상대의 태도나 반응이 기대에 못미쳤기 때문일 수 있다. 어쨌거나 이별은 쉽지 않다.

'땅을 밟고 하는 사랑은 언제나 흙이 묻었다'(황주리)고 하거니와 사랑은 어느 한쪽이 '이제 그만 끝'이라고 선언한다고 해서 끝낼 수 있는 게 아닌 까닭이다. 그렇더라도 변한 마음을 숨긴 채 괜한 트집을 잡거나 각종 핑계로 만남을 피하면 배신감은 더 커질 수 있다. 헤어질 수 있으나 이별에도 도리가 있다. 우정도 다르지 않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