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로 일컬어지는 당 태종의 치세를 떠받친 것은 재상 방현령과 위징,이정 등 유능한 신하 그룹이었다. 일세를 풍미했던 이들은 훗날 인생의 성공요인으로 한결같이 스승에게 배운 멈춤의 지혜를 꼽았다. 이들의 스승이었던 왕통은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칩거하며 학문에 몰두했다. 그는 필생의 역작 '문중자'에서 멈춤의 '지(止)'와 멈추지 않음의 '부지(不止)' 사이를 성공과 실패의 분수령으로 보고,살면서 맞닥뜨리는 여러 상황에서 멈춰야 할 때와 버려야 할 자세,취해야 할 올바른 행동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오늘날 혁신 아이콘으로 추앙 받는 스티브 잡스 역시 뒤집어 보면 자신이 창업한 애플에서 쫓겨나는 '강제 멈춤'이 있었기에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물론 잡스가 그보다 앞서 자신이 영입한 최고경영자(CEO) 존 스컬리와 공동 경영을 하던 당시 멈춤의 미덕을 실천했다면 회사에서 내쳐지는 수모를 면했을 수도 있다. 창업자와 전문경영인이라는 보완적 관계로 만난 이 둘은 당초 극도의 존경을 주고받을 만큼 사이가 좋았지만 만난 지 2년 만에 되돌리기 힘든 비방을 남긴 채 헤어졌다. 너무 급속히 서로 흠모했기에 이별도 빨랐고 그만큼 증오심도 깊었다고 할까.

정이 많은 사람은 쓴 아픔을 많이 겪으니 정도 적당한 때에 멈출 줄 알아야 한다고 문중자는 가르친다. 두 사람은 회사를 망친 잘못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지 못했고,마지막까지 차분히 머리를 맞대고 감정의 골을 좁히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원한을 해소하고 조화를 이루기 위한 필수조건,즉 스스로를 굽혀야 한다는 문중자의 가르침을 따르지 못한 것이다.

최근 신한은행 경영진의 갈등도 근본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멈춤의 철학이 부족해서 생긴 비극이 아닐까 싶다. 좀 더 일찍 후계자에게 권한을 넘겼더라면,먼저 자신을 낮추면서 상대방의 허물을 솔직하게 지적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속도와 성취가 유일의 선으로 칭송되는 오늘날 멈춤의 덕은 무한질주의 세태에 가려 빛을 잃어간다. 고위공직자로 퇴임 후 공기업이나 민간기업의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 다툼을 벌이는 분들에게 멈춤의 지혜가 아쉽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속 끓이는 88만원 세대를 앞에 두고 환갑이 넘어서도 자리 보존에 여념이 없는 아버지 세대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주 외자유치 자문을 위해 강원도청을 방문했다. 매번 느끼는 바이지만 지방으로 갈수록 기업 또는 외자유치 경험이 있는 인력이 절대 부족하다. 중앙정부나 대기업에서 퇴임한 전문가들이 지방으로 내려가 그간 닦아온 전문성을 활용하면 어떨까 한다.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인생 이모작이 될 뿐 아니라 지역 균형발전에도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다가올 신년에는 방에 걸린 역발상 세계지도를 떼어내야겠다. 그 자리에 '지지(知止)'라고 쓴 글씨 한 점 걸어 놓고 마음을 닦는 거울로 삼을까 한다.

이재술 < 딜로이트안진회계법인 대표 jaelee@deloitte.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