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춘추시대 제나라 환공(桓公)이 명재상 관중(管仲)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고죽국 정벌에 나섰다. 전쟁을 끝내고 돌아오던 중 혹한 속에 길을 잃고 말았다. 진퇴양난에 빠져 군사들이 추위에 떨고 있을 때 관중이 나섰다. "늙은 말의 지혜가 필요합니다(老馬之智可用也)".즉시 늙은 말을 한 마리 끌고와 고삐를 풀어놓고 앞장 세웠다. 말을 따라가자 얼마 안돼 큰 길이 나타나 무사히 돌아왔다고 한다. 한비자(韓非子) 설림(說林)편에 나오는 '노마지지(老馬之智)'의 고사다.

세상엔 젊음의 패기와 열정만으론 풀어낼 수 없는 일들이 있는 법이다. 아프리카 말리 출신의 역사 · 종교학자이자 문학가인 아마두 햄파테바는 아프리카에서 노인 한 명이 숨을 거두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고 했다. 거친 세상 살아내면서 얻은 지혜는 무엇보다도 소중하다는 뜻이다. 학교나 책이 변변히 없는 아프리카에서 교육은 주로 경험 많은 노인들의 옛이야기나 격언 전설을 통해 이뤄지기에 더 그럴 게다.

디지털 시대에 노인이 설 자리는 점점 줄고 있지만 노년의 지혜가 빛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영화배우 겸 감독인 클린트 이스트우드만 해도 그렇다. 이미 팔순인데도 작품이 점점 좋아진다는 평을 얻고 있다. 초기에 그는 '황야의 무법자''더티 하리' 같은 서부영화나 형사물의 마초형 배우로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1971년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로 감독에 데뷔한 후 나이를 먹을수록 묵직한 작품을 내놓고 있다. 2005년 '밀리언달러 베이비'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거머쥔 후에도 '아버지의 깃발''체인질링''그랜 토리노'등 화제작을 잇따라 발표했다.

검찰의 의원사무실 압수수색으로 얼어붙었던 국회가 정상화 된 데는 박희태 국회의장의 노마지지가 일조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대포폰 사용에 대한 국정조사,한 · 미 FTA 비준안 처리 등 만만치 않은 현안들이 대기하고 있어 불안한 봉합이란 시각도 있지만 여야 지도부를 끈질기게 설득해 국회 파행을 면하게 한 것은 경륜의 힘이 발휘된 결과란 얘기다.

어디 이스트우드나 박 의장뿐일까. 우리 주변에는 생생한 현장의 지혜를 갖춘 노인들이 많다. 그들을 속절없이 변두리로 밀어내면서 어떻게 부양할까를 걱정만 할 게 아니다. 도서관 못지 않게 풍부한 지식과 지혜,능력을 활용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