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말 처음 자산운용본부장으로 왔을 때 운용자산이 거의 없었죠. 돈을 유치하려면 먼저 실적이 있어야 하는데, 막막한 상황이었습니다."

장웅 가울투자자문 자산운용본부장(사진)은 2004년 9월 자산운용본부장으로 투자자문업계에 발을 들여놨다.가울투자자문이 디베스트투자자문이던 시절이었다.

◆ "굴릴 돈 없어 기관 수소문"

그는 1992년 대우증권에 공채로 입사해 지점에서 5년, 리서치센터에서 3년, 트레이딩룸(딜링룸)에서 4년을을 거쳤다.

대우증권 근무 시절 그는 '잘 나가는' 증권맨이었다. 영업지점에 있을 때에는 대우증권 전 직원 중 약정 규모 1등을 하기도 했고, 리서치센터에서 투자전략 애널리스트로 있는 도중 참여한 실전투자대회에서는 2위에 올랐다.

'주식을 잘 하더라'고 소문이 나기 시작하자 2000년부터는 대우증권 트레이딩룸에서 고유자산운용팀장을 맡으며 자금을 운용하게 됐다.

당시 그가 발굴했던 종목이 현대미포조선, 대우조선해양 같은 조선주다. 2004년 이런 종목들의 주가가 1만4000원에 불과하던 때였다.

"업황이 하도 안 좋아서 완전히 할인돼서 거래되던 때였죠. 주당순자산비율(PBR)이 0.2~0.3배였어요. 하지만 두고보면 턴어라운드할 것이라고 보고 꾸준히 투자했죠."

아쉽게도 그는 조선주의 결실을 보지 못하고 대우증권을 떠났다. 그는 "제가 떠난 이후 조선주 주가가 폭등했으니, 남아 있었더라면 인센티브를 꽤 챙겼을 것"이라며 웃었다.

그가 가울투자자문(당시 디베스트투자자문)에 합류한 2004년 쯤에는 코스모투자자문, 한가람투자자문, 피데스투자자문 등 국내 대표 투자자문사들이 개화하던 시기였다.

외부 자금 아웃소싱은 거의 없고 자기자본만 가지고 투자하던 가울투자자문을 키워보겠다는 투지를 가지고 자문업계에 입문한 장 본부장은 "입사해서 살펴보니 주식을 하고 싶어도 굴릴 돈이 없어 막막했다"고 털어놨다.

"먼저 의미 있는 기관에서 자금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끝에 겨우 한 연기금과 프레젠테이션(PT)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아직 아무 실적이 없으니 50억원 정도를 굴려봐라, 잘 하면 돈을 맡길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일반 주식형도 아니고 선물 등으로 헷지를 90% 하는 롱숏 펀드가 하나 맡겨졌다. 장 본부장은 기관에서 조건으로 내건 1년 목표수익률 10%를 4개월만에 달성했다.

이후 100억원의 주식형 자금을 정식으로 맡게 됐고,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하자 다른 연기금에서도 돈을 맡겨 자산이 700억원까지 늘게 됐다.

"1000억원 정도가 모이자 앞으로 회사를 더욱 성장시키려면 베팅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처럼 랩 시장이 커서 자문사가 영업하기 좋은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에 성과로 보여주는 수밖에 없었죠."

고민 중에 찾아낸 종목이 두산과 OCI(당시 동양제철화학)였다.

"두산은 형제의 난 이후 투자심리가 바닥이어서 주당 1~2만원 하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화학 섹터를 맡고 있는 매니저가 이 회사가 아무리 그래도 이 가격은 아닌 것 같다고 하더군요. 당시 회사 사정도 안 좋고 해서 탐방을 반기지 않는데도 무작정 찾아갔습니다."

그는 두산의 자산가치에 주목했다. 자산가치만 따져봐도 3만5000원까지는 가야 하는 주식이라고 생각했다. 펀더멘털(기업가치)이 아닌 내부갈등 때문에 주가가 바닥을 기는 지금이 기회라고 판단했다.

아니나 다를까 두산 주가는 2005년 말부터 반등하더니 2007년 말에는 30만원까지 치솟았다.

OCI는 신성장사업의 가능성을 먼저 알아본 케이스다.

"화학, 석회석 사업을 하는 회사였는데 영업적 매력이 없어 시장에선 별로 주목받지 못했죠. 기껏해야 자산주로 평가받던 시기였어요. 그런데 '폴리실리콘'이라는 얘기가 나오더라고요."

폴리실리콘이 뭐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일단 자료를 찾아보고 공부를 해보니 '될 만한 사업'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자산가치가 충분했기 때문에 들어가도 안전하다는 생각이었다.

장 본부장은 "계속 사모으기 시작해 펀드의 5%까지 비중을 늘리고 있는데 갑자기 주식이 주목을 받으면서 줄상한가를 치기 시작했다"며 "3만원대 들어갔는데 8만원에 팔고 나왔다"고 전했다.

이런 경험에 힘입어 사명을 가울투자자문으로 바꾼지 얼마 안돼 2007년 상반기 펀드평가사인 제로인의 투자자문사 평가에서 1위를 했다.

"그때 시장에 제대로 알려졌죠. 고객 숫자도 늘어나고요. 일임자산이 1000억~2000억원이 들어왔어요. 당시로서는 대단한 거였죠."

◆ "오를 때도 잘가고 빠질 때도 잘 지킨다"

2007년 급등장에서 투자자산이 거의 두배씩 오르자 수익을 실현할 때라고 보고 전체 포트폴리오를 보수적으로 바꾸는 작업을 했다. 그러다 리먼 브라더스 파산 사태가 터지고 2008년 증시가 폭락했다. 하지만 가울투자자문은 미리 준비한 덕에 상대적으로 선방할 수 있었다. 2008년 한해 동안도 제로인 자문사 평가에서 5위권 내를 유지했다.

그때 나온 얘기가 '가울은 오를 때도 잘가고 빠질 때도 잘 지킨다'였다.

2009년 또 한번 도약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 동안 투자자문사에 거의 아웃소싱을 주지 않던 국민연금이 그해 테스팅 그룹인 3그룹을 따로 만들어 검증이 되면 투자자문사라도 운용을 맡기겠다고 한 것이다. 국내 최대 '큰손'인 국민연금에서 인정 받을 수 있는 기회였다.

"자문업계 온지 5년만에 온 기회였어요. 올해 꼭 들어가야 한다고 단단히 준비를 했죠. 그때 운용 자산이 2000억원 이상이었고 실적도 좋았기 때문에 1차 서류에서 통과를 했습니다. 그리고 2차 PT를 위해 전 직원을 모아놓고 연습을 엄청 했어요."

가울투자자문은 최종적으로 3그룹 6개사 안에 들게 됐다. 1년 동안 300억원을 가지고 운용해본 결과 3그룹 중 2위사까지 정식으로 자금을 맡게 되는 거였다. 이 순위에서 가울투자자문은 6개사 중 1위를 차지했다. 올해부터는 국민연금 순수주식형 2그룹으로 승격하면서 정식으로 자금을 운용하게 됐다.

이제 가울투자자문의 기관 고객은 39개사로 '더 이상 늘릴 만한 기관 고객이 없다'고 할 정도다.

장 본부장은 "아직까지는 기관 위주로 영업을 했기 때문에 기관 비중이 높지만, 하지만 개인 자산운용 쪽도 이제 시작해 꾸준히 늘려나갈 생각"이라고 전했다.

"기관의 경우 상위 30%까지는 잘한다고 인정해줍니다. 단기적인 성과보다는 꾸준히 장기적으로 내는 성과를 더 좋아하고요. 반면 개인은 쏠림 현상이 심하고 한 두 달 내에 높은 수익률을 올리기를 바라지요."

그는 "국내 증시의 사이클이 한번 도는 기간이 3년 정도"라며 "자금을 맡길 때 그 회사의 과거 3년 성과를 봐야, 장이 올라갈 때와 내려갈 때의 능력을 판단할 수 있다"고 전했다.

요즘에는 변화와 가치, 안정적 수익이라는 가울투자자문의 핵심 키워드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있다. 변화를 가치로 연결시켜 안정적 수익을 내는 것, 이런 투자철학으로 롱런하고 싶다는 장 본부장의 바람이 지속될 수 있을지 지켜볼 대목이다.

한경닷컴 김다운 기자 kd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