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희 칼럼] '도전 1000곡' 10년, 그 장수 비결
원칙은 엄격하고 공정해서 예외라곤 없다. 첫소절부터 틀리건 마지막 한 대목에서 틀리건,한 소절을 틀리건 토씨만 틀리건 두 번 틀리면 똑같이 탈락이다. 휴대폰의 번호 저장 기능 덕에 식구들 건 물론 집 전화번호도 기억하기 힘든 디지털세상인데 여기선 가사를 통째로 외워야 한다. 순전히 아날로그 식이다.

SBS TV의 '도전 1000곡'이 500회를 넘겼다. 2000년 10월에 시작됐으니 만 10년이 지난 셈이다. 일요일 오전 이른 시간(8시10분~9시10분)에 방송되는데도 줄곧 시청률 10%대를 유지해온 장수 프로그램이다. 10년 동안 출연한 사람은 가수와 연기자,개그맨,스포츠스타 등 3900여명,이들이 부른 노래만 1만3700곡이 훨씬 넘는다는 마당이다.
포맷은 간단하다. 1 · 2차전과 패자부활전을 통해 결승에 진출한 2팀이 노래방 기기에 입력된 1000곡 중 상대가 골라준 노래를 가사대로 불러 승자를 가리는 것이다. 기준은 한 가지,1절 가사의 정확성 여부다. 한번 틀리면 경고,두번 틀리면 탈락이다. '어디'를 '어데'로 발음하거나 '사랑을' 해야 할 대목에서 '사랑은'이라고 해도 봐주지 않는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구성에도 불구, 이 프로그램엔 다른 곳에선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 있다. 대표적인 건 신 · 구 세대가 골고루 출연,다양한 장르를 소화한다는 점이다. 하춘화가 동방신기의 '허그(Hug)',SS501이 남진의 '님과 함께'를 부르는 식이다. 10주년 기념 방송(7,14일)에도 김도향과 슈퍼주니어,이은하와 채연 등이 같은 무대에서 겨뤘다.

원로가수와 중견,아이돌 그룹이 함께 나오니 온가족이 시청할 수 있고,자연히 평소 백안시하던 다른 세대의 특성을 살펴볼 수 있다. 어떤 노래든 자기 식으로 처리해 내는 중견가수는'역시나'싶고,흘러간 옛노래를 적절한 율동에 맞춰 경쾌하게 처리해 내는 아이돌그룹의 모습은 신세대들의 남다른 재주를 일깨운다.

출연자들의 성품이나 태도를 훔쳐볼 수 있는 건 덤이다. 심리적 부담은 같고 이기고 싶은 심정 또한 똑같을 텐데 순간순간의 표현은 상당히 다르다. 상대의 노래 번호를 골라줄 때도 누구는 777번을,누구는 444번을 부른다. 일찍 탈락하고 뒤에서 지켜볼 때의 태도도 차이 난다. 누구는 따라 부르거나 나와서 춤을 추는 등 분위기를 띄우고 누구는 딴전을 피운다. 탈락하고도 웃는 얼굴로 상대의 승리를 축하해주는 사람도 있고 서운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이 프로그램의 출연자들은 예쁘거나 잘 생겨야 할 일도,복부 근육을 키워야 할 일도 없다. 박자와 음정을 따지지 않으니 음치라도 상관없다. 그저 열심히 노력해서 가사를 외우면 이긴다. 패자부활전이 있으니 1 · 2차전에서 하필 모르는 노래가 나와 일찍 탈락했어도 만회할 수 있다. 1시간짜리 프로그램 속에 출연자들의 삶에 대한 태도와 도전정신이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얘기다.

결국 남녀 노소를 아우르는 것과 함께 공정한 기회 제공,예외없는 원칙 적용,패자 부활 가능성을 보여준 게 자극적인 대목이라곤 없는 '도전 1000곡'을 보기드문 장수 예능 프로그램으로 만든 비결인 셈이다. 출연자 개개인의 줄기찬 도전정신,성실한 자세,다른 사람과의 조화와 화합에 힘쓰는 모습 또한 이 아날로그 프로그램의 성공 요인이다.

기업을 비롯한 모든 조직과 국가의 성공 및 장수 비결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신 · 구 세대의 대결에서 구세대의 승리가 잦은 것에 대해 경로우대가 적용되는 것 아니냐는 말도 있지만 그보다는 후배와의 대결에서 지고 싶지 않은 선배 세대들의 숨은 노력이 더 크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출연 섭외를 받은 날부터 녹화 전날까지 밤잠을 설치며 연습한다는 하춘화씨의 말은 어느 분야에서건 오랜 세월 제자리를 지키는 사람의 열정이 어느 정도인지 알려준다. 우리 모두 주목할 만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