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 매니지먼트] 회사도 포기한 즉석카메라 살린 건 '입사 4년차 徐대리'
2001년 영국 BBC는 드라마 한 편을 새로 선보였다. '더 오피스(The office)'라는 제목의 시트콤이었다. 경영진은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성공할 것 같지 않은 아이디어만을 지원하는 '도박펀드'를 통해 만들어진 드라마였기 때문이다. 결과는 대히트였다. 더 오피스는 BBC 역사상 최고의 히트작 가운데 하나로 기록됐다.

구글은 작년 말 전 세계 직원들에게 휴대폰을 하나씩 나눠줬다. 출시 예정인 첫 안드로이드폰으로,당시에는 아직 시중에 모습을 드러낸 제품이 아니었다. 구글의 직원 관리 십계명 중 하나인 '도그 푸딩(dog fooding · 새 제품에 대한 내부 테스트)' 정책에 따른 것이다. 첫 구글폰인 '넥서스원'은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

사내 직원들의 역량을 한껏 활용한 성공 스토리 하나가 국내 즉석카메라 시장에서도 쓰여지고 있다. 한국후지필름이 그 주인공이다.

◆"20대 마케팅은 20대가"

2009년 3월.한국후지필름에서 구매를 담당하던 서정미 대리(28)는 즉석카메라 마케팅을 담당하라는 새 임무가 주어졌다.

입사 4년차,서 대리의 실망은 컸다. 즉석카메라 시장은 전 세계적으로 사멸해가는 시장이다. 즉석카메라의 대명사인 미국 폴라로이드조차도 디지털카메라에 밀려 2008년 사업철수를 선언한 마당에 즉석카메라 마케팅을 맡으라고 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즉석카메라는 간단한 기능만 있으면 되는 제품이라,딱히 마케팅 포인트가 될 만한 아이템도 없었다. 당시 한국후지필름의 즉석카메라 인스탁스가 회사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 남짓이었다. 반면 디지털카메라 신제품은 1년에도 서너 개씩 낼 정도로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서 대리는 넌지시 상사에게 배경을 물었다. 상사는 "즉석카메라 주 소비자층이 20대 여성인데 서 대리가 거기에 딱 맞는 인물 아닌가"라고 되물었다.

서 대리는 즉석카메라 마케팅이라는 '중책'을 맡아 각종 홍보기획안을 제출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퇴짜였다. "인스탁스가 홍보한다고 팔리겠어요"라는 면박만이 돌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서 대리는 문구류를 사기 위해 광화문 교보문고를 찾았다. 20대 여성들이 각종 캐릭터 상품들을 둘러보는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래 이거다. " 서 대리는 곧장 그길로 인스탁스 마케팅안을 다시 짜기 시작했다.

그동안 후지필름은 인스탁스가 '카메라'란 이유로 전자제품 대리점을 중심으로 영업을 해왔다. 하이마트,전자랜드와 같은 전자제품 대리점을 찾는 소비자들은 즉석카메라보다 일반 카메라나 디지털카메라에 관심이 많았다.

서 대리는 '인스탁스,전자제품 대리점 탈출 프로젝트' 구상에 들어갔다. 서 대리에겐 대형서점이 핵심 유통 채널로 보였다. 노트,볼펜 등을 자연스럽게 둘러보다 인스탁스를 돌아볼 수 있는 '접점'이라고 판단한 것.인스탁스와 필름,건전지를 패키지로 묶어 그해 9월부터 서점 판매에 들어갔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서점 매출이 전체 월간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0%에 육박할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헬로키티,미키마우스 입히니 '쑥'

인스탁스의 주요 소비자층을 분석해보니 20대 후반~30대 초반 여성들이 대부분이었다. 198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은 폴라로이드 카메라에 대한 추억이 있어 즉석카메라에 대한 호감이 많았다. 서 대리는 패션에 민감한 이들은 구매력까지 갖춰 타기팅을 잘하면 인스탁스를 팔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밋밋한 즉석카메라 외관에 헬로키티,미키마우스 등의 캐릭터 디자인을 접목한 한정판을 시험삼아 출시했다. "헬로키티 모델을 사고 싶은데 얼마나 기다려야 하느냐"는 문의전화가 밀려왔다. 내친 김에 전용가방에 미키 마우스 외관을 갖춘 접사렌즈까지 기획했다. 즉석사진필름에 다양한 컬러를 입힌 필름세트도 내놨다. 그 덕에 2006년 46만대를 팔았던 한국후지필름은 올 10월 들어 처음으로 누적기준 120만대 판매를 돌파하는 기록을 세웠다. 한국에서 인스탁스의 승전보는 후지필름 본사를 움직였다. 후지필름 본사 임원단과 전 세계 법인장들이 지난 9월 독일에서 모여 한국후지필름의 마케팅 사례를 학습했다.

한국후지필름은 전 세계 현지법인 가운데 유일하게 즉석카메라 인스탁스로 '대박'을 터뜨렸다. 그 비결은 '고객이자 직원'인 서 대리의 창의적 아이디어였다.

김현예/김용준 기자 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