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중순 파키스탄 북서부 와지리스탄의 산악지대에서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에 전달할 무기를 실은 트럭들이 움직였다. 지형이 험한 데다 캄캄한 밤이라 아무도 알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미군 무인폭격기 '프레데터'가 나타나 포탄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트럭들은 화염에 휩싸였다. 작전을 지휘한 곳은 미국 중앙정보국(CIA) 본부.와지리스탄 지형을 본뜬 시뮬레이션을 통해 무인폭격기의 항로를 정확하게 찾아내 공격한 것이다.

이렇게 시뮬레이션을 짜는 것은 슈퍼컴퓨터다. 기본 명제를 몇 가지 입력하면 수십억개의 가능성들을 단시간에 검토하고 일정한 추세를 뽑아내 실제와 비슷한 상황을 만들어낸다. 군사분야뿐아니라 기상예측,유전자 분석,항공기 · 자동차 설계 등에 폭넓게 쓰이고 있다. 얼마 전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추가 양적완화 결정을 내리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연준 고문단이 시뮬레이션을 돌려 양적 완화의 여파를 분석했더니 내년 상반기 달러가 10% 하락하고 인플레이션과 실업률은 목표치에 근접할 것이란 예측이 나왔다고 한다.

슈퍼컴퓨터는 첨단 복합 기술의 결정체다. 많은 연산 제어용 칩을 병렬로 연결해 계산 속도를 높인다. 칩을 어떻게 연결해야 데이터를 주고받을 때 병목현상 없이 속도를 올리느냐가 관건이다. 중국이 슈퍼컴퓨터 분야에서 미국을 눌렀다는 소식이다. 국제슈퍼컴퓨터 콘퍼런스가 최근 발표한 '세계 500대 슈퍼컴퓨터'에서 중국 국방과학기술대에 있는 '톈허(天河) 1호'가 1위로 올라선 것.

톈허 1호의 연산처리 속도는 초당 2566조회다. 기존 1위 미국 '재규어'(초당 1759조회) 보다 800조회 이상 빠르다. 그 뒤를 중국의 '네뷸러'(1271조회),일본의 '쓰바메2.0'(1192조회)등이 쫓고 있다. 하지만 이 순서는 얼마 후 바뀔 가능성이 높다. 미국이 초당 약 2경(조의 1만배)회의 컴퓨터를 개발 중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슈퍼컴퓨터 개발은 중단된 상태다. 지난해 9월 발의된 국가슈퍼컴퓨팅 육성법안은 정치 이슈에 묻혀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다. 기상용 슈퍼컴퓨터 '해온'(19위)과 '해담'(20위)은 모두 외국에서 사 왔다. 당장은 사다 쓰는 게 효율적일지 모르지만 슈퍼컴퓨터는 인공위성처럼 독자 개발이 필수다. 미국 중국 일본의 치열한 개발 경쟁을 강건너 불 보듯 '감상'만 해서는 안된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