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아내와 주말에 파리의 전형적인 카페에 갔다. 파리의 카페에서는 커피만 파는 것이 아니고 음식도 파는데,동네 카페 중에서도 음식을 잘하는 곳이 많다. 중년의 한국 부부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우리도 음식을 시킨 후 이내 할 말이 없어 조용해진다. 이에 비해 옆에 온 50대의 프랑스인 부부는 끊임없이 뭔가를 속삭인다.

프랑스 사람들의 대화술은 정말 능란하다. 프랑스의 교육 과정에서 언어가 매우 중요시되는 것,그리고 토론문화가 발달한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근본적으로는 국민성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프랑스를 방문하는 한국 사람들은 프랑스에서 영어가 잘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는 상당히 불안해 한다. 우리나라 수출 기업들이 유럽 시장에 진출하려고 할 때 일반적으로 영국이나 독일,네덜란드처럼 영어로 의사소통하기가 편한 지역부터 시작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많은 한국사람들이 아직도 프랑스인들이 영어를 알아도 자존심이 강해서 일부러 안 쓰는줄 알고 있다.

1990년대 초 정도까지만 해도 프랑스에서는 영어가 잘 통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었다. 길을 묻기 위해 영어로 말을 붙이면 "Parlais vous Francais?(불어를 할 줄 아십니까)"하고 되묻기가 일쑤였다. 그런데 요즘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프랑스 사람들이 독일이나 네덜란드 등 이웃 유럽 사람들에 비해 영어를 썩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비즈니스하는 사람들은 물론 길거리나 일반 상점에서도 영어가 일반화돼 가고 있다.

외국인에게 처음부터 영어로 말을 건네는 사람들까지 흔히 볼 수 있을 정도다. 이젠 영어를 잘하는 것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기회만 있으면 영어를 쓰려고 한다. 지하철 광고판에는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영어를 배우라는 어학 학원 광고도 보인다. 20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EU(유럽연합)의 전신인 EEC(유럽경제공동체)가 창설될 당시 회원국은 프랑스,영국,네덜란드,벨기에,룩셈부르크 5개국이었으니 3개국이 불어를 쓰는 나라였다. 그러던 것이 현재 27개 회원국으로 늘어났지만,불어 사용국 수는 변함이 없다. 그만큼 유럽 내에서 불어의 위치가 약화될 수밖에 없다. 불어의 영향력 약화는 아이러니컬하게도 프랑스가 주도했던 EU의 역할이 증대됨에 따라 더욱 심해졌다. 최근 들어 중국,브라질,러시아 등 신흥 개발도상국이 부상하면서 영어의 영향력을 더욱 심화시켰다.

어쨌거나 프랑스의 이 같은 변화로 인해 프랑스에서 외국인으로서 의사 소통 문제는 크게 개선됐다. 불어가 더 이상 우리 기업들이 프랑스 시장을 개척하는 데 장애 요인으로 작용할 수 없게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