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특유의 감각을 발휘하는 예술가들이 있다. 일본에 릴리 프랭키가 있다면 한국엔 백현진(52)이 있다. 박찬욱 감독이 “주저 없이 천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종합예술인’이다.1972년 서울에서 태어난 백현진은 홍익대 미대 조소과를 중퇴했다. 1997년 어어부 프로젝트로 데뷔한 그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스타일과 퍼포먼스로 ‘한국형 아방가르드(전위적) 밴드’란 별명을 얻었다. 박찬욱 영화 ‘복수는 나의 것’(2002)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OST)을 맡아 미니멀한 사운드를 보여줬다.백현진의 상상력 시발점은 미술이다. 2017년 국립현대미술관이 매년 주최하는 ‘올해의 작가상’ 후보에 오르는 등 설치미술로 인정받은 작가다. 20여 년째 작품 활동을 이어오며 PKM 등 국내외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2021년 드라마 ‘모범택시’에서 메인 빌런인 박양진 유데이터 회장을 소화하며 유명해졌다. 영화감독인 박경근 감독이 연출한 ‘백현진쑈 문명의 끝’이 지난달 막을 내린 ‘제50회 서울독립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는 등 다양한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유승목 기자
‘발레 신(神)들의 경연’.지난 11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발레의 별빛, 글로벌 발레스타 초청 갈라 공연(발레의 별빛)’은 올림포스산에서 벌어지는 신들의 겨루기를 연상케 했다. 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 입단을 앞둔 전민철과 파리오페라발레단 박세은, 네덜란드국립발레단 최영규 등 ‘K발레 스타’가 절정의 실력을 뽐낸 이번 공연은 김선희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66)를 위한 자리다. 오는 2월 정년 퇴임을 앞둔 김 교수를 위해 한예종 출신 발레리노와 발레리나 20여 명이 고국 땅을 밟았다.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 홍향기는 한국 창작 발레 ‘코리아 이모션 정(情), 미리내길’의 한 자락으로 사별한 남편을 그리는 마음을 발레와 한국적 춤사위에 절절히 녹여냈다. 바닥에 쓰러져 떠나가는 남편의 영혼을 보내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박수가 뒤늦게 이어졌다. 관객들이 감정을 추스리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기 때문이다.같은 학교를 졸업했지만 프로 무대에서 만나 춤추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 파트너도 많았다. 영국 로열발레단의 퍼스트 솔리스트 전준혁과 미국 보스턴발레단 수석무용수 채지영은 차이콥스키의 고전 발레 ‘잠자는 숲속의 공주(미녀)’ 속 결혼식 그랑 파드되(2인무)를 보여줬다. 전준혁은 로열발레단에서 갈고닦은 귀족적이며 기품 있는 춤사위가 두드러졌고 채지영 역시 전준혁과 처음 호흡을 맞춘다는 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깨끗한 동작을 이어갔다.폴란드국립발레단의 정재은과 아메리카발레시어터(ABT)의 한성우는 ‘지젤’의 2막 2인무를 보여줬다. 한성우가 지난해 11월 방한해 ABT 무용수와 보여준 지젤 2인무와
“그 아이가 날 좋아합니다.”아버지는 그토록 싸워댔던 큰아들이 실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고 울컥한다. 아버지는 소싯적의 외도를 들켜버린 뒤 큰아들과 메우기 힘든 틈이 생겼다고 느꼈다. 하지만 17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아들의 본심을 알게 됐다. 감격한 아버지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회사에서 해고당해 가정의 생계가 막막한 상황에서 사망보험금을 타겠다고 결심한다.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은 이 결심을 위해 3시간 동안 쉼 없이 휘몰아치는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지난 7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M시어터에서 개막한 ‘세일즈맨의 죽음’은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시기를 살아가는 가족 이야기를 담고 있다. 1949년 미국 브로드웨이 초연 후 연극계 3대상인 퓰리처상, 토니상, 뉴욕 연극 비평가상을 모두 휩쓸었다.30년 넘게 세일즈맨으로 미국 전역을 누빈 가장 윌리 로먼은 젊은 시절 능력 있는 영업 사원이었다. 큰아들 비프와 둘째 아들 해피에게 존경받는 아빠였고 아내에게 사랑받는 남편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회사에서 입지는 좁아지고, 아이들과도 멀어졌다. 특히 비프와는 눈만 마주쳐도 말다툼이 날 정도다. 전도유망한 럭비 선수 비프는 고등학교 시절 대학 3곳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지만 지금은 변변한 직업도 없이 서른네 살이 됐다. 연극은 아버지 윌리의 아름답고 행복했던 과거와 비극적인 현재를 교차해서 보여준다.주인공 윌리 역에는 박근형(사진)과 손병호가 더블 캐스팅됐다. 지난해에 이어 다시 무대에 오르는 박근형은 객석의 공기 흐름까지 바꾸는 압도적 존재감과 열연으로 극을 이끈다.자존감을 잃은 윌리가 환각 속에서 알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