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과장은 오늘도 자존심에 금이 갔다. 사업안 마감 하루 전날까지 강 건너 불 구경만 하고 있던 팀장은 사업안을 훑어 보더니 "내가 언제 이렇게 하랬어?"라며 다 뒤집으란다. 조금 전 회의에 들어가서 임원들에게 깨지고 왔는지 "네가 부족하니 후배들이 뭘 보고 배우겠냐"며 신경을 건드리는 말도 내뱉는다. '무능한 팀장님 덕에 내가 삽질한 날들이 하루 이틀인 줄 아느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그러면서도 팀장이 나보다 월급을 더 챙긴다는 생각이 들자 환멸이 솟는다. 치받아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일단 화장실로 향했다. '들이받을까,꾹 참을까….' 치받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양 어깨에 올라 앉아 있는 처자식이 맘에 걸린다. 그래서 오늘도 참기로 했다. '월급쟁이의 숙명이려니'하고 말이다.

◆'나의 투쟁'을 알리지 마라

상사에게 들이받을 때는 주변 상황을 살피고 적당한 때를 노려야 한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진리다. 치받기의 대원칙 중 하나는 '조용히'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 개기는 것만큼 성공 확률이 낮은 항명은 없다.

중견기업 해외마케팅팀에 근무하는 김모 과장(37)은 최근 대기업에서 날아온 동갑내기 팀장에게 대놓고 들이댔다 본전도 못 건졌다. 김 과장은 기존 팀의 운영 실적을 꼬치꼬치 캐물으며 무시하는 듯한 팀장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다. 지난 9월 전략회의에서 일이 터졌다. 팀장이 김 과장의 아이디어를 묵살하자 그는 벌컥 화가 나 팀장에게 삿대질까지 했다.

팀장으로부터 이메일이 날아왔다. '불만이 많은 듯하니 인사팀에 당신의 팀을 변경해 달라고 요청하겠다'는 것.회사 주력부서 중 하나인 해외마케팅팀에서 밀려나면 커리어 관리에 불이익을 볼 것이 훤했다. 김 과장은 결국 '죽을 죄를 지었다'는 답메일을 보내고 꼬리를 내렸다.

공기업에 근무하는 정모 대리(33)는 정의감에 불탔다가 피를 본 케이스다. 연말이 가까워 오자 무분별한 회식과 팀장의 마구잡이 공금 사용으로 팀 예산이 '빵꾸'날 상황인 것을 발견한 그는 총대를 메기로 결심했다. 예산 내역을 뽑아 "팀장님,개인 술약속은 이제 그만 잡으셔야겠습니다"고 고언을 했다. 얼굴이 불그락푸르락해진 팀장은 이후 건건이 정 대리의 일에 딴죽을 걸었다.

사내 게시판도 안전하지 않다. 한 중견 제조업체의 임모 대리(32)는 익명게시판에 사장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는 글을 올렸다가 인터넷프로토콜(IP) 추적을 당했다. 글은 즉시 삭제됐고 그는 한직으로 보내졌다.

◆주위 여건부터 만들어라

상사에게 미움 받지 않으면서 할 말 다 하고 사는 사람들은 나름의 요령을 갖고 있다. 이벤트 회사의 이모 대리(31 · 여)는 상사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땐 술 한잔 사겠다고 제안한다. 술은 선배가 사야 한다는 통념이 있어 후배가 '술을 사겠다'고 하면 대부분 '그 친구가 내게 할 말이 있나보다'는 생각을 갖고 나오게 마련.이 대리는 "상사에게 대놓고 버럭하기 보다는 인생상담을 받고 싶다며 말을 꺼내면 관계가 나쁜 상사라도 대화를 시작할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국내 한 증권사 지점에 근무하는 김모 대리(33 · 여)는 실적 발표날을 이용한다. 증권사는 실적이 곧 생명이기 때문에 아무리 후배라도 실적이 좋으면 뭐라고 하지 못한다. 김 대리는 월간 실적이 좋게 나오는 날까지 기다렸다가 평소 마음에 두고 있던 문제점을 상사에게 들이민다.

상사에 따라서는 '할 말 하는 부하'를 더 예뻐하는 경우도 있다. 국내 모 생활용품 유통회사에 다니는 김모 과장(39)은 부장에게 적극 저항한 덕에 오히려 신임을 받게 됐다. 그는 한 지역도시에 물류단지 터를 확보하는 문제로 부장과 싸웠다. 그는 부장이 제안한 땅이 단가는 싸지만 인허가 과정이 복잡해 비용이 더 많이 들 것이라 판단했다. "내 판단에 문제가 있다면 사표를 내겠다"고 버텨 주장을 관철시켰다. 이후 부장은 단둘이 술을 마시자고 하면서 "옛 친구가 매입해 달라고 부탁한 땅이어서 거절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김 과장은 "내막을 외부에 알렸다면 상사와의 관계는 유지될 수 없었을 것"이라며 당시를 떠올렸다.

◆유치하게 치받으면 웃음거리만 돼

모 대기업 기획팀에는 최근 '전설'이 탄생했다. 기획팀에 배치됐던 심모 과장(35)이 주인공.'이 팀의 브레인이 되겠다'며 의욕을 앞세웠지만 행동은 그에 턱없이 못 미친 게 문제였다. 띠동갑으로 어린 대학 아르바이트생에게 노골적으로 집적대서 구설수에 오르고,욕심이 너무 커 협력업체 관계자들의 신상정보도 절대 팀원들과 공유하지 않았다. 결국 참지 못한 팀원들은 그를 다른 부서로 보내버렸다.

이후 심 과장은 팀장과 팀원들에게 악의에 가득찬 이메일을 보냈고 인수인계도 전혀 해주지 않았다. 유치한 행각의 하이라이트는 부서를 옮기는 당일이었다. 떠나는 날 팀의 벽에 고사성어 '절치부심(切齒腐心)'을 크게 인쇄해 붙여놓고 떠난 것.열심히 노력해 나중에 되갚겠다는 뜻이긴 한데 맥락엔 영 맞질 않았다. 한 팀원은 "팀원들끼리 이 사람 초딩 아니냐며 웃었다"고 전했다.

◆습관성 사표는 안돼

김 과장,이 대리들이 '들이받기'를 할 때 가장 최후의 수단은 사표다. 그러나 현실은 만만치 않다. 싱글일 때는 '때려칠까'를 입에 달고 살던 김 과장,이 대리들도 결혼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대기업에 다니는 안모 과장(36)은 퇴근 후 "여보,나 회사 때려치고 장사나 할까"라고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는 '나만 믿어 오빠!내가 다 벌어줄게'란 대답을 듣고 싶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우리 개 같이 벌어서 나중에 여행다니면서 정승처럼 살아야지.집도 장만해야 하고…"였다.

최근 육아휴직 후 복귀한 김모 대리(33 · 여)는 최근 직장을 그만 둔 선배를 보고 사표 쓸 마음을 접었다. 경제적 자유를 위해서다. 김 대리는 "선배가 돈 벌 땐 스타벅스 커피도 마시고 옷도 샀는데 지금은 손발 다 잘렸다고 푸념을 하더라"며 "남편 생활비로 손가락 빠는 모습 보니 나도 모르게 일을 열심히 하게 된다"고 전했다.

위협용으로 던지는 습관성 사표는 '부메랑'이 돼 날아올 수 있다. 중견 기업에 다니던 성모 주임(31)은 1년 전 유학을 가겠다며 사표를 던졌다. 연말이라 바쁘던 회사는 그를 간절하게 잡았다. 이후 6개월도 안돼 스카우트 제안을 받은 그는 또 사표를 냈다. 그러나 스카우트를 제안한 업체가 연봉 및 대우 수준을 흐리멍텅하게 말하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사표를 두 번이나 번복한 그를 두고 권고사직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그의 사수는 "엄마는 우는 아이 젖 한번 더 줄지 몰라도,회사는 우는 사원 떨구고 간다"고 진단했다.

강유현/이관우/이정호/김동윤/이상은/이고운 기자 yhk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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