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국민들이 엄청난 배신감에 사로잡히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실제 공동모금회에는 이번 사태를 비난하는 전화가 빗발치고 기부를 취소하는 사례도 줄을 잇고 있다고 한다. 국민들의 신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는 뜻에 다름아니다. 공동모금회 회장과 이사진 전원이 사퇴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런 까닭임은 물론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사진 사퇴가 아니라 이런 비리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철저한 제도적 장치를 갖추는 일이다. 공동모금회 임직원들의 도덕성을 재무장하는 한편 성금 사용 내역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회계 감사와 감독 체계도 대폭 강화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공동모금회가 독점적으로 누리고 있는 기부금 공제 우대를 다른 복지기관들의 모금에도 똑같이 적용해 경쟁체제를 도입하는 방안 또한 적극 검토해봐야 할 사안이다. 차제에 다른 복지기관들의 투명성을 제고하는 방안도 함께 추진돼야 함은 물론이다.
무엇보다 우려되는 것은 이번 사태가 이제 겨우 정착 기미를 보이는 기부문화에 찬물을 끼얹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다. 특히 복지단체의 비리에 환멸을 느껴 기부 자체를 중단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리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공동모금회뿐아니라 다른 단체들에서도 이런 현상이 함께 나타나고 있다니 더욱 그렇다.
물론 기부는 개개인이 마음에서 우러나서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자가 왈가왈부할 사안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 일로 인한 노여움과 배신감 때문에 기부를 중단한다면 그것은 그리 현명한 결정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비난을 받아야 할 것은 복지단체 임직원들이지,그들이 수행하고 있는 업무나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약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동모금회에 실망했다면 기부선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게 더 좋은 선택일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나라는 개인 기부가 활발한 편이 못 된다. 기부라고 하면 으레 재벌 기업이나 부자들만 하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실제 공동모금회가 지난해 모금한 3318억원 중 개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23.1%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기업이나 사회 · 종교단체 등이 낸 돈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개인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의 개인 기부 비율은 전년의 17.9%보다는 크게 높아진 것이다. 매월 1만~2만원씩 후원금을 내는 소액 기부가 늘고 있는 것도 반가운 소식이다. 풀뿌리 기부가 증가하고 있는 것은 기부에 대한 국민들의 생각이 빠른 속도로 성숙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이번 일이 정착 조짐을 보이는 기부문화 자체를 뒤흔드는 결과로 연결돼서는 안될 일이다. 사회적 관심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엉뚱한 피해를 입는 일도 있어선 안된다. 따라서 복지단체들 또한 모금행위 자체를 중단하거나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일부 지역 복지단체가 사랑의 온도계 행사 등을 취소한 것은 그런 맥락에서 잘못된 결정이다. 복지 단체 임직원들의 비리 여부와는 상관없이 온정을 필요로 하는 불우한 이웃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나눔의 정신이 무엇인지 그 본질을 봐야 한다. 빈대 밉다고 집에 불을 놓을 수는 없다.
이봉구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