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 뒤집어 읽기] 환전상서 은행가로…교황도 주요 고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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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디치 가문의 흥망성쇠
국제 환어음 이용해 막대한 富 축적
다빈치 등 후원…르네상스 꽃 피워
국제 환어음 이용해 막대한 富 축적
다빈치 등 후원…르네상스 꽃 피워
피렌체의 우피치 박물관에 소장된 보티첼리 작품 '동방박사의 경배'(1475~1476)는 전성기를 구가하던 메디치 가문과 깊은 관련이 있다. 메디치 가문과 동업 관계에 있는 델 라마라는 은행가가 주문한 이 그림에는 코지모 데 메디치와 그의 아들 피에로와 조반니가 동방박사로 그려져 있다. 14세기 초 단테 '신곡'의 '지옥편'에 자기 가문의 문장(紋章)을 새긴 커다란 돈주머니를 목에 건 채 지옥 구덩이에서 불의 비를 맞으며 '타오르는 땅을 긁고 불똥을 털어내는' 모습으로 그려지던 피렌체의 은행가들은 르네상스 전성기에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성스러운 인물들로 격상된 것이다.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메디치 가의 사업은 그저 그런 수준의 환전상으로 시작했다. 대략 14세기 중엽부터 은행업과 유통업 부문에서 사업이 크게 확대됐지만,당시까지만 해도 이들은 수준 높은 사업가라기보다는 마피아 같은 폭력단에 가까웠던 것 같다. 1343~1360년 이 가문 사람들 중 5명이나 사형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기업이 한 단계 격상한 때는 조반니가 대 메디치 회사를 세우고 본부를 로마에서 피렌체로 옮겼던 1397년이라 할 수 있다. 그가 1429년에 사망할 즈음 이 회사의 사업 네트워크는 이탈리아만이 아니라 유럽의 광범위한 지역을 포괄했다. 영국의 양모,이탈리아와 플랑드르의 모직물,플랑드르의 태피스트리,이탈리아의 견직물,동양에서 들어온 후추와 향신료를 거래했다.
여기에 교황청의 명반(明礬 · alum) 거래가 더해졌다. 명반은 직물에 염료를 고착시키는 데 쓰이는 광물질이어서 유럽 경제 성장에 따라 수요가 엄청나게 커졌지만 거의 전량을 이슬람권인 터키에서 수입해 썼다. 그런데 다름 아닌 교황령 내부에서 15세기 후반에 고품질의 대규모 명반 광상이 발견된 것이다. 교황은 신앙의 적인 터키산 명반 수입을 금지시키고 교황청 명반만을 사용하게 했는데,메디치 가문이 이 명반의 수출 독점권을 획득했다.
메디치 가 사업의 핵심 부문은 늘 은행업이 차지했다. 환전과 대부는 그 자체로 고수익을 가져다 주는 데다 실물 거래와 긴밀히 연결돼 있었다. 이들을 '상인-은행가'라고 부르는 것이 이 때문이다. 그들은 13세기에 이탈리아에서 처음 등장한 환어음(bill of exchange)을 잘 이용했다. 이것은 자금 대출과 외환거래가 섞인 방식이다. 예컨대 피렌체에서 이탈리아 화폐로 자금을 대출해 준 채권자가 환어음을 발행해 브뤼주의 파트너에게 보내면 그곳에서 채무자의 파트너로부터 북유럽 화폐로 대출액을 회수하는 식이다.
다른 장소에서 다른 화폐로 채무를 결제하는 복잡한 관계를 이용해 국제거래의 결제 수단으로 이용할 수도 있고,또 환율 속에 이자를 교묘히 숨겨 교회의 종교적 규제를 피해갈 수도 있었다. 메디치 가는 항시 자금을 필요로 하는 정치권에 자금을 대출해 주며 다양한 사업 특권을 얻어냈다. 이 은행의 주요 고객으로는 역대 영국 국왕부터 부르고뉴 공작,교황까지 포함돼 있었다.
메디치 가문의 전성기는 보티첼리의 그림에 아기 예수의 발을 감싸 안고 있는 동방박사로 그려진 코지모 데 메디치가 사업을 주관하던 시기였다. 1451년 즈음 사업 네트워크를 보면 로마,베니스,밀라노,브뤼주,런던,제네바,아비뇽 등지에 주요 지점들이 세워져 있었다. 이 중 가장 수익이 높은 곳은 동양의 향신료를 거래하는 베니스였다.
각 지점에는 메디치 가문과 친족 관계 혹은 동업 관계에 있던 사람들이 활동했다. 지점들은 상당한 정도의 자율성을 가지고 사업을 운영하되 피렌체에 있는 본부의 지휘를 받았다. 이것은 한국과 일본의 재벌과 가장 가까운 방식이며,이때 메디치 본사는 일종의 지주회사(holding)에 해당한다. 파트너 가문들의 자손들은 각 지점에서 일정 기간 연수를 거친 후 사업을 시작했다.
메디치 가문의 경제적 · 정치적 힘은 더욱 커져갔다. 1464년 코지모가 제네바 지점장인 프란체스코 사세티에게 명령해 지점 전체를 프랑스의 리옹으로 이전시킨 것이 한 사례다. 이로 인해 유서 깊은 제네바 정기시(fair)는 결정적으로 몰락했고,그 대신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와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는 리옹이 성장해 갔다.
기업이 정치권과 손잡는 것은 독이 되기 십상이다. 영국 국왕 에드워드 4세나 부르고뉴 공인 샤를 대담공 등은 거액을 대출하고는 끝내 되갚지 않아 막대한 손해를 끼쳤다. 국내 정치에서도 정적들이 이들을 압박해 한때 코지모는 베니스로 추방됐고,그의 손자 줄리아노는 라이벌 파치(Pazzi) 가문에 의해 잔인하게 암살됐다. 머리에 칼을 맞고 19차례나 단도에 찔려 죽은 것을 보면 대기업 가문 간 경쟁관계가 극에 달했음을 알 수 있다.
정치의 무상함에 비하면 예술과 학문의 후원은 훨씬 빛나는 성과를 냈다. 메디치 가문의 전성기를 마무리한 로렌초 데 메디치는 베로키오,다빈치,보티첼리,기를란다이오,미켈란젤로 등 기라성 같은 르네상스의 천재들을 후원했다. 미켈란젤로는 로렌초와 식사를 같이하며 격조 높은 대화를 나누던 사이였다.
1492년 로렌초가 사망한 후 모든 것이 끝났다. 프랑스의 이탈리아 침공과 그에 뒤이은 광신자 사보나롤라의 신정정치(神政政治)라는 극단적 상황에서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에서 축출됐다. 조만간 유럽 최고의 명문 가문으로 복귀했지만(프랑스 왕비를 2명이나 배출했다) 메디치 가문의 사업은 예전과 같은 수준을 되찾지는 못했다.
주경철 <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메디치 가의 사업은 그저 그런 수준의 환전상으로 시작했다. 대략 14세기 중엽부터 은행업과 유통업 부문에서 사업이 크게 확대됐지만,당시까지만 해도 이들은 수준 높은 사업가라기보다는 마피아 같은 폭력단에 가까웠던 것 같다. 1343~1360년 이 가문 사람들 중 5명이나 사형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기업이 한 단계 격상한 때는 조반니가 대 메디치 회사를 세우고 본부를 로마에서 피렌체로 옮겼던 1397년이라 할 수 있다. 그가 1429년에 사망할 즈음 이 회사의 사업 네트워크는 이탈리아만이 아니라 유럽의 광범위한 지역을 포괄했다. 영국의 양모,이탈리아와 플랑드르의 모직물,플랑드르의 태피스트리,이탈리아의 견직물,동양에서 들어온 후추와 향신료를 거래했다.
여기에 교황청의 명반(明礬 · alum) 거래가 더해졌다. 명반은 직물에 염료를 고착시키는 데 쓰이는 광물질이어서 유럽 경제 성장에 따라 수요가 엄청나게 커졌지만 거의 전량을 이슬람권인 터키에서 수입해 썼다. 그런데 다름 아닌 교황령 내부에서 15세기 후반에 고품질의 대규모 명반 광상이 발견된 것이다. 교황은 신앙의 적인 터키산 명반 수입을 금지시키고 교황청 명반만을 사용하게 했는데,메디치 가문이 이 명반의 수출 독점권을 획득했다.
메디치 가 사업의 핵심 부문은 늘 은행업이 차지했다. 환전과 대부는 그 자체로 고수익을 가져다 주는 데다 실물 거래와 긴밀히 연결돼 있었다. 이들을 '상인-은행가'라고 부르는 것이 이 때문이다. 그들은 13세기에 이탈리아에서 처음 등장한 환어음(bill of exchange)을 잘 이용했다. 이것은 자금 대출과 외환거래가 섞인 방식이다. 예컨대 피렌체에서 이탈리아 화폐로 자금을 대출해 준 채권자가 환어음을 발행해 브뤼주의 파트너에게 보내면 그곳에서 채무자의 파트너로부터 북유럽 화폐로 대출액을 회수하는 식이다.
다른 장소에서 다른 화폐로 채무를 결제하는 복잡한 관계를 이용해 국제거래의 결제 수단으로 이용할 수도 있고,또 환율 속에 이자를 교묘히 숨겨 교회의 종교적 규제를 피해갈 수도 있었다. 메디치 가는 항시 자금을 필요로 하는 정치권에 자금을 대출해 주며 다양한 사업 특권을 얻어냈다. 이 은행의 주요 고객으로는 역대 영국 국왕부터 부르고뉴 공작,교황까지 포함돼 있었다.
메디치 가문의 전성기는 보티첼리의 그림에 아기 예수의 발을 감싸 안고 있는 동방박사로 그려진 코지모 데 메디치가 사업을 주관하던 시기였다. 1451년 즈음 사업 네트워크를 보면 로마,베니스,밀라노,브뤼주,런던,제네바,아비뇽 등지에 주요 지점들이 세워져 있었다. 이 중 가장 수익이 높은 곳은 동양의 향신료를 거래하는 베니스였다.
각 지점에는 메디치 가문과 친족 관계 혹은 동업 관계에 있던 사람들이 활동했다. 지점들은 상당한 정도의 자율성을 가지고 사업을 운영하되 피렌체에 있는 본부의 지휘를 받았다. 이것은 한국과 일본의 재벌과 가장 가까운 방식이며,이때 메디치 본사는 일종의 지주회사(holding)에 해당한다. 파트너 가문들의 자손들은 각 지점에서 일정 기간 연수를 거친 후 사업을 시작했다.
메디치 가문의 경제적 · 정치적 힘은 더욱 커져갔다. 1464년 코지모가 제네바 지점장인 프란체스코 사세티에게 명령해 지점 전체를 프랑스의 리옹으로 이전시킨 것이 한 사례다. 이로 인해 유서 깊은 제네바 정기시(fair)는 결정적으로 몰락했고,그 대신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와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는 리옹이 성장해 갔다.
기업이 정치권과 손잡는 것은 독이 되기 십상이다. 영국 국왕 에드워드 4세나 부르고뉴 공인 샤를 대담공 등은 거액을 대출하고는 끝내 되갚지 않아 막대한 손해를 끼쳤다. 국내 정치에서도 정적들이 이들을 압박해 한때 코지모는 베니스로 추방됐고,그의 손자 줄리아노는 라이벌 파치(Pazzi) 가문에 의해 잔인하게 암살됐다. 머리에 칼을 맞고 19차례나 단도에 찔려 죽은 것을 보면 대기업 가문 간 경쟁관계가 극에 달했음을 알 수 있다.
정치의 무상함에 비하면 예술과 학문의 후원은 훨씬 빛나는 성과를 냈다. 메디치 가문의 전성기를 마무리한 로렌초 데 메디치는 베로키오,다빈치,보티첼리,기를란다이오,미켈란젤로 등 기라성 같은 르네상스의 천재들을 후원했다. 미켈란젤로는 로렌초와 식사를 같이하며 격조 높은 대화를 나누던 사이였다.
1492년 로렌초가 사망한 후 모든 것이 끝났다. 프랑스의 이탈리아 침공과 그에 뒤이은 광신자 사보나롤라의 신정정치(神政政治)라는 극단적 상황에서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에서 축출됐다. 조만간 유럽 최고의 명문 가문으로 복귀했지만(프랑스 왕비를 2명이나 배출했다) 메디치 가문의 사업은 예전과 같은 수준을 되찾지는 못했다.
주경철 <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