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때는 무시이군(武尸伊郡)이라 불렀으나 고려 때부터 영광으로 고쳐 불렀던 곳.국어사전은 영광(靈光)에 대해 '신령스러운 빛'이라는 뜻과 '왕의 은덕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는 풀이를 함께 싣고 있다. 사전이 말하는 왕이란 전제군주뿐 아니라 법왕인 부처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리라.그렇다. 전남 영광은 그렇게 법왕의 은덕을 입은 땅이다.

초전가람지 영광 불갑사를 찾아 떠난다. 화양연화의 시절을 멀리 보내버린 빈 들판이 존재의 쓸쓸함을 되새김하고 있다. 불갑사로 들어가는 길가에서 공(空)이 되어 사라진 스님들이 남긴 유(有)와 만난다. 부도 6기와 비 4기가 있는 부도밭이다. 부도밭 오른쪽에 있는 자운지탑은 말년에 이 절에 주석했던 수선사(송광사) 제13대 사주 각진(1270~1335) 국사의 부도다. 이 팔각원당형부도는 8각 지붕 옥개석의 기왓골마저 새기지 않았을 만큼 소박하다. '평생을 방장으로 지냈으나 한 개의 재물도 갖지 아니하였다(平生方丈不留一物)'라는 이달충이 쓴 각진 국사 비문의 말이 전혀 허랑하지 않다.

◆백제불교 초전가람(初傳伽藍) 불갑사

지국천왕이 연주하는 비파 소리를 들으며 천왕문을 지나면 강당인 만세루가 나타나고 누하진입방식이 아닌 이 누각을 오른쪽으로 돌아가자 바로 대웅전 앞마당이다. 불갑사는 백제 침류왕 원년(384)에 인도승 마라난타가 세웠다는 설과 백제 무왕 때 행은 스님이 세웠다는 설이 있다. 대웅전 어간의 찬바람에도 시들지 않는 솟을모란꽃살문이 아름답다. 법당 안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약사불과 아미타불 등 목조삼세불좌상이 아래를 굽어보고 있다.

나그네의 마음을 끄는 건 대웅전 좌측의 일광당이란 전각이다. 승당으로 쓰이고 있는 이 건물은 화엄사 구층암을 연상시키듯 울퉁불퉁 휜 부재를 다듬지 않고 사용한 자연스러운 미감이다. '일광당(日光堂)'이란 이름도 그럴싸하다. 방안에 들어앉아 있으면 창호지를 뚫고 오는 한 줄기 빛에 온갖 무명에 갇힌 내 마음이 금세 환해질 것만 같다.

건물 뒤편으로 돌아가자 추운 겨울날에 걸터앉아 볕바라기를 하고 싶은 툇마루가 있다. 일찍이 영광 출신 시조시인 조운(1900~?)은 '창(窓)을 열뜨리니/ 와락 달려 들올듯이/ 만장(萬丈) 만록(萬綠)이/ 뭉게뭉게 피어나고// 꾀꼬리/ 부르며/ 따르며/ 새이새이 걷는다'라고 일광당의 정취를 노래한 바 있다. 불현듯 승방 토방에 놓인 잘 닦여진 고무신 한 켤레가 내 오염된 정신의 티끌 한 자락을 씻어준다.

대웅전 우측,귀부만 남은 각진국사비 바로 옆에는 참식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불갑산은 잎 뒤에 하얀 솜털이 많아서 백담호(白淡毫)라고도 부르는 참식나무의 자생북한지(自生北限地)다. 전설에 따르면 삼국시대 이 절의 정운 스님이 인도 유학 중 공주와 사랑을 하다가 국왕에게 추방당했는데 헤어질 때 공주에게 정표로 받은 열매를 가져다 심은 것이 퍼져 참식나무숲이 됐다. 망각에 대항하는 방법 중 하나는 쉴 새 없이 유전자를 퍼뜨리는 것이다. 공주의 분신인 참식나무가 숲을 이루기 시작하면서 스님의 그리움도 덩달아 숲을 이루었으리라.

불갑사의 '숨어 있는 1인치' 수다라성보박물관을 찾는다. 높이 7㎝가량 되는 간다라 시대의 황금소탑과 그보다 조금 큰 10세기 철불좌상이 짓는 고졸한 미소가 인상적이다. 대웅전 용마루에 얹혀져 있었다는 거대한 보탑형 장식물도 있다. 이 장식물을 떼어내던 찰나 대웅전 지붕은 실감나게 공(空)의 참맛을 보았으리라.

◆백제불교 전래지 좌우두와 원불교영산성지

이제 불갑사를 떠날 시간이다. 앰브로스 비어스는 《악마의 사전》에서 길에 대해 '지루한 곳과 도착해봤자 별 나을 것도 없는 곳을 잇는 땅 조각'이라고 했지만 가야 할 길이 남아 있는 삶이란 얼마나 희망적인가. 둘레 12㎞,1960년대만 해도 전남에서 세 번째 크기였다는 불갑 수변공원에서 "나무아미타불"을 암송하며 숨을 고른 후 법성진 숲쟁이(명승 제22호) 고개를 넘는다.

이윽고 인도의 중 마라난타가 불법을 전하러 왔을 때 상륙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법성면 진내리 좌우두 '불교전래지'에 닿는다. 벽면에 석가모니의 출생에서 고행까지의 전 과정을 23개 원석에 간다라 조각기법으로 음각한 부용루를 거쳐 거대한 4면 불상이 있는 곳까지 올라 멀리까지 펼쳐진 포구를 바라본다. 법성포는 백제 때 아무포(阿無浦)라 불렀다. 아미타불을 함축한 이름이다.

현재의 법성포라는 지명도 '법(法)'은 불교,'성(聖)'은 성인인 마라난타를 가리키는 말로 추정할 수 있다. 물론 전승이거나 추정일 뿐 이곳이 마라난타가 상륙한 지점이라는 확실한 물증은 없다. 그러나 4면 불상 앞에서 포구를 바라보는 내 머릿속에서 서서히 신화적 상상력이 발동한다. 산과 산 사이에 낀 포구를 돛단배를 타고 들어온 마라난타 일행이 뭍에 오른다. 깡마른 몸집에 수염이 길게 자랐지만 눈빛만은 성성한 마라난타.오랜 항해 끝에 낯선 땅에 도착했지만 피로한 기색도 없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더니 이내 시야에서 사라진다.

탑원과 간다라 유물전시관을 둘러보고 나서 백수읍 길룡리 원불교 영산성지로 향한다. 원불교 창시자 박중빈(1891~1943)이 태어난 곳이다. 간척사업을 하고 저축조합을 세우고 밤에는 기도하면서 '생활이 곧 법'임을 실천하며 물질개벽을 통해 정신개벽을 이루려던 소태산 박중빈.그가 득도했다는 노루목 대각터엔 '만고일월(萬古日月)'이라 새긴 비가 서 있다. 해와 달을 희롱할 만한 만고의 진리를 깨달았다는 뜻인가. 소태산이 처음 수행을 시작했다는 옥녀봉을 바라보면서 설도항 기독교인순교지로 발길을 옮긴다.

◆이성이 잠들면 요괴가 눈을 뜬다

영광은 6 · 25 때 끔찍한 대학살이 벌어졌던 곳이다. 9 · 28 인천상륙작전과 미군 진주 소식을 듣고 만세를 불렀던 군민들은 미군이 떠난 후 빨치산들에게 피의 보복을 당했다. 10월27~30일에 떼죽음을 당한 숫자가 당시 30만 영광군민 중 4분의 1이 넘는 3만4421명이었다고 하니 이 끔찍한 현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염산면 설도항 높다란 언덕 위에 자리 잡은,1939년에 세워진 야월교회(현 염산교회)도 학살 현장 가운데 하나다. 피난을 가지 않은 채 신앙터를 지키던 염산교회 교인의 3분의 2인 77명이 죽창에 찔려 죽고 몽둥이에 맞아 죽거나 수장당해 순교했다. 염전으로 가득한 염산에서 그들이야말로 가장 빛나는 '인간 소금'인 셈이다. 설도항 광장 한쪽에는 학살 현장을 생생하게 돋을새김한 기독교인순교탑이 서 있다.

고은 시인은 '관념에 대하여'란 시에서 '사람이 관념을 이루었습니다/ 그로 하여금/ 사람이 드높이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그로 하여금/ 온 누리를 노예로 삼았습니다'라고 관념 혹은 이데올로기를 비판한다. 문득 바라본 순교탑 근처 포구의 갈대숲이 집단으로 흔들리고 있다. 부화뇌동이 얼마나 끔찍한 맹목인가를 알지 못하는 저 갈대는 얼마나 위험한 식물인가.

안병기 여행작가 smreoquf@hanmail.net


◆ 맛집

'외로워서 밥을 많이 먹는다던 너에게/ 권태로워 잠을 많이 잔다던 너에게/ 슬퍼서 많이 운다던 너에게/ 나는 쓴다. / 궁지에 몰린 마음을 밥처럼 씹어라/ 어차피 삶은 네가 소화해야 할 것이니까. '(천양희 시 '밥') 굳이 굴비의 유래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삶은 각자가 소화해야 할 굴욕이다. 그러나 굴비가 있는 식단은 굴욕을 조금은 더 즐거운 것으로 치환하기도 한다. 영광읍 단주리 영진파크 아파트 근처 국일관(062-351-2020)은 영광에서 굴비 한정식집으로 입소문 난 집이다. 가격은 굴비의 크기에 비례하는데 굴비정식 1인식(보통 1만원)을 시키면 기본 반찬 11가지가 따라 나온다. 영광식(중) 1만5000원,옥당식(상) 2만원,특별식(특상) 3만원.


◆ 여행 팁

영광은 서해안 낙도로 가는 여객선들이 출항하는 해상교통의 허브다. 송이도,석만도,안마도행 배는 홍농 계마항에서 출항하고 낙월도행은 염산 향하도에서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