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복세 용인금속 대표(80)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중학생 때부터 철공소에서 일했다. 그 덕에 철과 관련된 것이면 생산 기계부터 제품까지 직접 만드는 '철의 달인'이 됐다. 1968년 경부고속도로 공사를 맡은 유공(현 SK)이 박 대표가 근무하던 직장에 아스팔트를 담을 수 있는 드럼통 제작을 의뢰해왔다. 당시 국내엔 드럼통 제조 업체가 없었다. 박 대표는 서울 을지로에서 모형을 한 개 구한 뒤 일일이 금형을 깎아 드럼통 제조 장비와 제품을 만들었다. 이것이 최초의 국산 드럼통이다.

박 대표는 슬하에 1남6녀를 뒀다. 직장생활로는 먹고 살기가 힘들었다. 드럼통 사업을 하려고 독립하려 했지만 회사에서 핵심 기술자인 박 대표를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드럼통 제조 기술을 전수해주고 11년간 드럼통 대신 마개 부분(플러그 플랜지)만 만들기로 약속한 후에야 1979년 용인금속을 창업할 수 있었다.

늦둥이 막내인 박갑수 용인금속 팀장(39)은 어려서부터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봐왔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으리라 마음먹었다. 울산대 항공우주공학과를 나온 박 팀장은 대학 때부터 아버지 사업을 도왔다. 1995년 용인금속이 드럼통 생산을 할 때 정식 입사했다.

◆1라운드 아버지 승리

박 팀장이 입사하자 갈등은 시작됐다. 아버지는 '기술'이 최고라고 여겼다. 대졸사원도 입사하면 무조건 현장으로 보내 기술교육을 시켰다. 박 대표는 기계 다루는 것을 쳐다보다가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면 사원들에게 성을 내기 일쑤였다. 박 팀장은 행정직은 별도 교육을 시키고 대졸 사원들에겐 좀 더 좋은 대접을 해줘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아버지는 들은 체도 안 했다. 참다 못한 박 팀장은 "더 이상은 못하겠다"고 회사를 뛰쳐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박 팀장은 아버지가 옳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드럼통은 원래 표준 규격으로 만들지만 원재료인 냉연철판 값이 오르면서 고객사들은 철을 조금 쓰면서도 동일한 내구성을 가진 제품을 요구해왔다. 납기 직전에 크기나 높이를 변경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경쟁사들은 갑작스러운 고객사의 요청에 탄력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그러나 생산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용인금속 직원들은 고객사의 요구를 정확히 이해하고 바로 라인에 적용했다. 그 덕에 후발 주자면서도 용인금속은 시장점유율을 꾸준히 올릴 수 있었다. 아버지의 압승이었다.

◆2라운드 아들 승리

그렇다고 박 팀장이 아버지에게 끌려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드럼통을 트럭에 싣는 작업은 사람이 직접 해야 하는데 무거운 제품을 들고 내리고를 반복하는 일을 하려는 직원은 많지 않았다. 며칠 일하다 퇴사하거나 무리한 임금 인상을 요구하기 일쑤였다. 경영진이 직원들에게 끌려다니는 상황이 반복됐다.

박 팀장은 외국인 근로자를 고용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박 팀장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국 사람 가르치기도 힘들다는 게 이유였다. 박 팀장은 "제 소원이 어학연수였는데 외국인과 대화라도 하며 일하게 해 달라"고 설득했다. 박 대표는 아들의 주장을 못 이기는 척 세 명의 외국인 근로자를 채용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외국인 근로자들은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고 일했다. 기술을 배우는 태도도 '3D 업종'이라며 무시하는 한국인들보다 적극적이었다. 기존 직원들에게 자극이 될 정도였다. 박 대표는 크게 만족했고 지금은 전체 직원 30명 중 8명이 외국인 근로자다. 박 팀장이 거둔 작지만 값진 '승리'였다.

◆아들을 믿는 아버지

최근 들어 부자는 '자동화 설비 도입'문제로 대립하고 있다. 박 대표는 "드럼통 제조를 제대로 하려면 생산 기계부터 직접 만들 줄 알아야 한다"며 "직접 만들면 비용도 적게 드는데 외국 장비를 사오려고 하느냐"며 박 팀장을 타박했다. 박 팀장은 "더 효율적인 생산라인 구축을 위해선 자동화는 필수"라고 맞섰다.

10년 설득 끝에 최근 일부 장비의 수입건에 대해 아버지의 결재를 받았다. 박 팀장은 "2세 경영인이 제일 힘든 것은 아버지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젊은 아이디어를 회사에 도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아들의 마음을 알고 있는지 박 대표도 점점 아들에게 권한을 넘기고 있다. 지난해 모 대기업의 해외 드럼통 공장 건설을 위한 기술이전 프로젝트를 박 팀장에게 일임했다. 박 팀장은 장비 선택부터 설치까지 모두 담당했고 예산을 40% 이상 아끼면서 수율 좋은 생산라인을 완성했다. 박 대표는 "완벽하진 않지만 그만하면 나쁘진 않다"고 말했다. 박 팀장은 "입사 이래 처음 칭찬을 들었다"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박 팀장은 영업에서도 탁월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입사 당시 10억원에도 못 미치던 매출을 지난해 200억원까지 끌어올렸다. 그는 "모두가 아버지 덕"이라고 손사래를 쳤지만 박 대표는 "사람 상대하는 것만큼은 누구보다 낫다"며 아들을 치켜세웠다. 박 팀장은 "자동화 라인을 도입해 빠른 대응력과 제품에 대한 깊은 이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고 강조했다.

울산=남윤선 기자 inkling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