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연평도 도발] 팔순 할머니 "얼마나 더 산다고 뭍으로 떠나나" 한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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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흘 만에 뱃길 열린 현장 가보니
건물 곳곳 불에 타 검게 그을려
제삿상 위에 떡ㆍ과일 그대로
"아들 두고 갈 수 없다" 남기도
경찰, 파출소서 촛불 켜고 근무
건물 곳곳 불에 타 검게 그을려
제삿상 위에 떡ㆍ과일 그대로
"아들 두고 갈 수 없다" 남기도
경찰, 파출소서 촛불 켜고 근무
25일 오후 2시 연평도 외항선착장.중무장한 해병대원들이 섬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신분을 일일이 확인하며 삼엄하게 지키고 서 있다. 상공에는 군용 헬기 두 대가 연신 섬 주위를 돌며 경계를 펼친다. 통신 긴급복구반 차량을 얻어타고 연평로를 달려 대연평도로 들어가는 길엔 세찬 바닷바람이 거세게 몰아친다. 도로와 옹벽 곳곳이 포탄을 맞아 깊게 패였고,멀리 보이는 산들은 불에 타 검게 변했다. 이맘때 한창 바다에서 조업해야할 꽃게잡이 어선들이 부두에 묶인 채 찬 바람만 맞고 있다.
◆전쟁터로 변한 마을
마을 입구로 들어서자 버려진 자전거들이 가장 먼저 보인다. 자전거를 타고 돌아본 섬의 모습은 전쟁터를 방불케할 정도로 처참했다. 포탄을 맞은 집들은 대부분 심하게 부서진 채 폭삭 주저앉았다. 곳곳이 불에 타거나 검게 그을린 건물들이 흉한 몰골을 드러냈다. 피해가 덜한 집도 유리창이 대부분 깨져 집안의 가재도구들이 밖에서 그대로 보였다. 골목길에는 주인잃은 개들이 며칠 동안 굶었는지 도로에 묻은 음식 국물을 핥아먹으며 지나갔다.
푸른색 지붕의 한 집 주방에는 제사를 위해 차려 놓은 듯한 떡과 과일 등 음식들이 상위에 그대로 놓여있다. 마당에는 조업을 위해 준비해뒀던 어구들과 볕에 말리던 채소들이 어지럽게 나뒹굴어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짐작케 했다. 앞 유리가 깨진 차량들이 방치돼 있고 뒤집힌 차도 눈에 띄었다.
◆"얼마나 더 산다고…"
마을회관 앞에서 어렵사리 만난 박선비 할머니(85)는 "큰 아들이 데리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6 · 25전쟁 때 연평도로 피난왔다는 박 할머니는 "오늘은 섬 주민들이 모두 떠나야 한다고 들었다"며 "이 나이에 얼마나 더 산다고 뭍으로 나가겠느냐"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죽어도 여기서 죽는 것이 낫겠다 싶어 안 나가려고 했는데…"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박씨의 가족은 두 딸과 세 아들,손자 · 손녀까지 모두 10여명.두 딸과 둘째,셋째 아들은 지난 24일 아이들을 데리고 섬을 빠져나갔고 할머니는 큰 아들과 남았다. 박 할머니는 "시각장애인인 막내 아들은 뭍에서 제대로 생활하기 힘들다"며 끝내 눈물을 쏟았다.
포탄이 떨어져 마을이 불바다로 변하던 순간을 떠올릴 때는 몸서리를 쳤다. "마을회관에 있는데 갑자기 '쿵'하는 소리가 들리는거야.처음엔 군인들이 훈련하는 줄 알았는데 옆에서 계속 쿵하는 소리가 들려.뭔일이 터졌나싶어 아들한테 전화를 했지.근데 통화가 안돼.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집으로 뛰었지." 집에 도착한 할머니는 아연실색했다. 창문이 다 깨지고 근처 딸의 집은 포탄에 맞아 처참하게 부서져 있었던 것.황급하게 인근 방공호로 대피했고 그곳에서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다.
◆촛불켜고 파출소 지키기도
시가지의 연평종합운동장은 벽면에 직격탄을 맞은 듯 구멍이 뻥 뚫려있다. 도로 한가운데 지름 50㎝ 정도의 포탄 자국과 인근 가드레일에 파편 자국이 선명하게 보인다. 주민 최모씨(47 · 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1박2일(인기 예능프로그램)에 나온 관광지'라는 좋은 이미지였는데 앞으로 누가 놀러 오겠느냐"며 "복구도 문제지만 그 이후 섬 경제가 더 걱정"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남부리 연평파출소 건물은 반파됐다. 오모 경사는 "건물 일부가 파손되고 전기 공급이 끊겼지만 경찰이 파출소를 비울 수도 없어 어제 밤 촛불을 켜놓고 근무했다"고 말했다.
◆"꽃게잡이철인데 생계가 막막"
연평도에서 나고 자라 꽃게잡이로 생계를 이어온 김광춘씨(47)는 "이곳 사람들은 바다에서 먹고 사는 데 이렇게 돼서 막막하고 대책이 없다"고 토로했다. 김씨는 "지금이 막바지 꽃게잡이철인 데 23일부터 출어가 통제돼 일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며 "하루 일을 쉬면 1500만~2000만원의 손해가 난다"고 울상지었다.
안금녀씨(80 · 여)는 "깨진 창문으로 찬 바람이 들어와 이틀 동안 한숨도 못 잤다"며 "연평도에 남고 싶었지만 나 때문에 아들까지 고생할 것 같아 떠나기로 했다"고 말한 뒤 짐을 싸기 시작했다. 최성일 연평주민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47)은 "며칠 뒤 서해상에서 한 · 미 군사훈련이 예정돼 있어 주민들이 또 다시 불안에 떨고 있다"며 "날씨까지 추워지고 집도 파손돼 여기서 더 머물기는 어렵다"고 전했다.
연평초등학교에서는 적십자사 봉사대원들이 무료 급식을 실시했다. 적십자사 관계자는 "3일 전부터 급식을 했는데 점심 때만해도 300여명이 몰렸던 주민들이 다 빠져나갔는지 저녁에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차마 못 떠나겠다"
오후 5시가 가까워지자 선착장에서 "5시에 배가 떠나니 주민들은 모여달라"는 방송이 나왔다. 주민들은 옷가지와 가재도구 등을 들고 급하게 선착장으로 향했다.
표를 끊고 인천에서 들어왔다 돌아가려던 주민 김모씨(여 · 50)는 출발 5분을 앞두고 급하게 배에서 뛰쳐나갔다. 이곳 해병대에 복무 중인 아들을 남겨두고 차마 떠날 수 없어서였다. 김씨는 "아들의 제대가 보름밖에 남지 않았다"며 "아들을 두고 어미가 어찌 편히 가서 지낼 수 있겠느냐"며 눈물을 떨궜다. 급하게 연평도를 떠났다 여객선을 타고 다시 돌아온 일부 주민들도 가족과 폐허가 된 삶의 근거지를 남기고 다시 인천으로 가는 배편에 쉽사리 몸을 싣지 못했다.
연평도=김일규 · 임도원 기자 black0419@hankyung.com
◆전쟁터로 변한 마을
마을 입구로 들어서자 버려진 자전거들이 가장 먼저 보인다. 자전거를 타고 돌아본 섬의 모습은 전쟁터를 방불케할 정도로 처참했다. 포탄을 맞은 집들은 대부분 심하게 부서진 채 폭삭 주저앉았다. 곳곳이 불에 타거나 검게 그을린 건물들이 흉한 몰골을 드러냈다. 피해가 덜한 집도 유리창이 대부분 깨져 집안의 가재도구들이 밖에서 그대로 보였다. 골목길에는 주인잃은 개들이 며칠 동안 굶었는지 도로에 묻은 음식 국물을 핥아먹으며 지나갔다.
푸른색 지붕의 한 집 주방에는 제사를 위해 차려 놓은 듯한 떡과 과일 등 음식들이 상위에 그대로 놓여있다. 마당에는 조업을 위해 준비해뒀던 어구들과 볕에 말리던 채소들이 어지럽게 나뒹굴어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짐작케 했다. 앞 유리가 깨진 차량들이 방치돼 있고 뒤집힌 차도 눈에 띄었다.
◆"얼마나 더 산다고…"
마을회관 앞에서 어렵사리 만난 박선비 할머니(85)는 "큰 아들이 데리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6 · 25전쟁 때 연평도로 피난왔다는 박 할머니는 "오늘은 섬 주민들이 모두 떠나야 한다고 들었다"며 "이 나이에 얼마나 더 산다고 뭍으로 나가겠느냐"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죽어도 여기서 죽는 것이 낫겠다 싶어 안 나가려고 했는데…"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박씨의 가족은 두 딸과 세 아들,손자 · 손녀까지 모두 10여명.두 딸과 둘째,셋째 아들은 지난 24일 아이들을 데리고 섬을 빠져나갔고 할머니는 큰 아들과 남았다. 박 할머니는 "시각장애인인 막내 아들은 뭍에서 제대로 생활하기 힘들다"며 끝내 눈물을 쏟았다.
포탄이 떨어져 마을이 불바다로 변하던 순간을 떠올릴 때는 몸서리를 쳤다. "마을회관에 있는데 갑자기 '쿵'하는 소리가 들리는거야.처음엔 군인들이 훈련하는 줄 알았는데 옆에서 계속 쿵하는 소리가 들려.뭔일이 터졌나싶어 아들한테 전화를 했지.근데 통화가 안돼.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집으로 뛰었지." 집에 도착한 할머니는 아연실색했다. 창문이 다 깨지고 근처 딸의 집은 포탄에 맞아 처참하게 부서져 있었던 것.황급하게 인근 방공호로 대피했고 그곳에서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다.
◆촛불켜고 파출소 지키기도
시가지의 연평종합운동장은 벽면에 직격탄을 맞은 듯 구멍이 뻥 뚫려있다. 도로 한가운데 지름 50㎝ 정도의 포탄 자국과 인근 가드레일에 파편 자국이 선명하게 보인다. 주민 최모씨(47 · 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1박2일(인기 예능프로그램)에 나온 관광지'라는 좋은 이미지였는데 앞으로 누가 놀러 오겠느냐"며 "복구도 문제지만 그 이후 섬 경제가 더 걱정"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남부리 연평파출소 건물은 반파됐다. 오모 경사는 "건물 일부가 파손되고 전기 공급이 끊겼지만 경찰이 파출소를 비울 수도 없어 어제 밤 촛불을 켜놓고 근무했다"고 말했다.
◆"꽃게잡이철인데 생계가 막막"
연평도에서 나고 자라 꽃게잡이로 생계를 이어온 김광춘씨(47)는 "이곳 사람들은 바다에서 먹고 사는 데 이렇게 돼서 막막하고 대책이 없다"고 토로했다. 김씨는 "지금이 막바지 꽃게잡이철인 데 23일부터 출어가 통제돼 일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며 "하루 일을 쉬면 1500만~2000만원의 손해가 난다"고 울상지었다.
안금녀씨(80 · 여)는 "깨진 창문으로 찬 바람이 들어와 이틀 동안 한숨도 못 잤다"며 "연평도에 남고 싶었지만 나 때문에 아들까지 고생할 것 같아 떠나기로 했다"고 말한 뒤 짐을 싸기 시작했다. 최성일 연평주민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47)은 "며칠 뒤 서해상에서 한 · 미 군사훈련이 예정돼 있어 주민들이 또 다시 불안에 떨고 있다"며 "날씨까지 추워지고 집도 파손돼 여기서 더 머물기는 어렵다"고 전했다.
연평초등학교에서는 적십자사 봉사대원들이 무료 급식을 실시했다. 적십자사 관계자는 "3일 전부터 급식을 했는데 점심 때만해도 300여명이 몰렸던 주민들이 다 빠져나갔는지 저녁에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차마 못 떠나겠다"
오후 5시가 가까워지자 선착장에서 "5시에 배가 떠나니 주민들은 모여달라"는 방송이 나왔다. 주민들은 옷가지와 가재도구 등을 들고 급하게 선착장으로 향했다.
표를 끊고 인천에서 들어왔다 돌아가려던 주민 김모씨(여 · 50)는 출발 5분을 앞두고 급하게 배에서 뛰쳐나갔다. 이곳 해병대에 복무 중인 아들을 남겨두고 차마 떠날 수 없어서였다. 김씨는 "아들의 제대가 보름밖에 남지 않았다"며 "아들을 두고 어미가 어찌 편히 가서 지낼 수 있겠느냐"며 눈물을 떨궜다. 급하게 연평도를 떠났다 여객선을 타고 다시 돌아온 일부 주민들도 가족과 폐허가 된 삶의 근거지를 남기고 다시 인천으로 가는 배편에 쉽사리 몸을 싣지 못했다.
연평도=김일규 · 임도원 기자 black041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