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인수 · 합병(M&A)을 목적으로 설립된 스팩(SPAC)이 공급 과잉으로 비상장 우량 기업과의 합병 협상에 차질을 빚고 있다. 성장성이 높은 우량 기업은 제한적인 반면 증시에 상장된 스팩은 20개사에 육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말을 앞두고 스팩들이 합병작업을 서두르고 있지만 곳곳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는 비상장 우량 기업 오너들은 느긋한 입장이다. 이로 인해 스팩들 간 과잉 경쟁이 빚어져 비상장 기업의 합병가치(밸류에이션)가 본래가치보다 높아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28일 증권업계에 따르면 A증권이 설립한 스팩은 최근 합병 대상 비상장 기업을 압축하고 본격 협상에 나섰지만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비상장 기업의 최근 실적을 바탕으로 합병가치를 산정하고 있지만 해당 기업 오너가 결정을 미루고 있기 때문이다.

A증권 스팩 담당자는 "다른 스팩에서 관심을 보이는 경우도 있지만 기업이 다른 스팩에 주당 가치를 더 높게 쳐줄 수 있는지 타진하는 경우도 있다"며 "괜찮은 기업은 많지 않고 스팩은 많다 보니 합병협상이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여타 스팩들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올해 스팩제도 도입 후 상장된 스팩만 18개에 달한다. 29~30일 공모 청약을 받는 동부증권의 '동부TS블랙펄스팩' 등 상장 절차를 밟는 스팩이 6곳 더 있다. 스팩 설립이 가능한 자기자본 1000억원 이상의 증권사 대부분이 스팩을 만드는 셈이다.

상장 스팩이 단기간 급증한 데다 차별성도 없어 공급 과잉 함정에 빠졌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스팩의 합병 대상 기업이 신성장동력 기업으로 엇비슷하고,공모 규모도 200억원 안팎에 쏠려 있다. 18개 상장 스팩 가운데 3분의 2인 12개는 공모 규모가 150억~250억원이다. 스팩 관련 세금 족쇄도 잇달아 풀렸지만 현재까지 비상장 우량 기업과의 합병 발표는 나오지 않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 M&A 전문가는 "스팩과 합병하려는 우량 기업 입장에선 어떤 스팩과 상장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가치를 높게 매겨주는 스팩과 손을 잡으면 된다"며 "증권사들은 스팩 합병을 종료하고 내년까지 수익을 확정지으려고 서두르는 반면 우량 기업 오너는 서두를 필요가 없는 상황"이라고 귀띔했다.

스팩과 합병 대상 기업 사이에 힘의 균형이 깨지면서 합병 밸류에이션이 스팩 주주가 아닌 비상장 기업 오너에 유리하게 산정될 우려도 나오고 있다. B증권 스팩 담당자는 "스팩 간 합병 경쟁이 치열할수록 비상장 기업의 밸류에이션이 높게 책정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본래 가치보다 낮게 가치가 결정되면 스팩 주주들에게 돌아가는 이익이 많아지지만,반대 경우엔 비상장 기업 오너에게 돌아가는 이익이 커진다"고 설명했다.

조진형 기자 u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