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여기가 공장 부지입니다. 지금은 아무것도 없지만,내년 중순이면 그럴듯한 공장이 들어서게 될 겁니다. 의류 공장 만드는 데 6개월이면 충분하거든요. 내년 가을 · 겨울 제품부터 만들 겁니다. 한번 믿고 맡겨주세요. "

1975년 겨울 경기도 성남.스물여덟 살 청년이 빈 공터를 앞에 두고 중년의 외국인 신사에게 이런저런 설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외국인 신사는 당시 세계 최대 스키복업체였던 미국 화이트스텍의 도널드 케네디 회장.지인의 소개로 만난 한국 청년의 손에 이끌려 공장 부지를 둘러보긴 했지만,그의 얼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해외 유수 기업도 공장을 짓고 생산라인을 안정화시키는 데 2년가량 걸리는데,신생 업체가 "1년 만에 해내겠다"고 장담하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바이어 입장에선 그다지 손해볼 일이 없었던 터.케네디 회장은 "품질이 나쁘면 반품하겠다"는 조건으로 오리털이 들어간 스키복 1만벌을 주문했다. 청년은 동료들과 밤샘작업에 들어갔고,약속대로 이듬해 가을 · 겨울 시즌에 맞춰 스키복 9600벌을 미국행 배에 실어보냈다.

성기학 영원무역 회장(63)이 회사를 차린 뒤 처음으로 고가품 해외 수주에 성공한 순간이었다. 납품한 스키복은 순식간에 팔려나갔고,화이트스텍은 영원무역이 자체 검품 과정에서 걸러낸 나머지 400벌까지 미국으로 가져가 판매했다.


◆아버지가 물려준 '사업가 DNA'

[CEO & 매니지먼트] 인물탐구-성기학 영원무역 회장, 노스페이스로 도심까지 정복한 '아웃도어 챔피언'
성 회장은 이처럼 남다른 배포와 추진력으로 해외 바이어를 하나씩 뚫어나갔고,꼼꼼한 품질 관리로 한번 맺은 인연을 오래도록 이어갔다. 그러기를 36년.이제 그는 국내외에 6만여명의 식솔을 거느린 매출 1조1000억원 규모의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기업의 수장이자 국내 아웃도어 업계의 '황제'가 됐다.

성 회장이 태어난 곳은 서울 돈암동이지만,그의 마음속 고향은 경남 창녕이다. 조상 대대로 창녕에 터를 잡은 데다 성 회장도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성 회장은 '사업하는 방법'과 '베푸는 즐거움'을 아버지(성재경 · 1981년 작고)로부터 배웠다. 창녕에 큰 농장을 갖고 있던 부친은 1950년대에 양파 재배로 큰돈을 벌었다. 지금은 창녕의 특산물이 된 양파를 그곳에서 처음 대량 재배한 사람이 바로 성 회장의 아버지였다.

성 회장은 어릴 때부터 방학기간 등 시간이 날 때마다 아버지 일을 거들었다. 작물 재배는 물론 위탁상에게 물품을 넘긴 뒤 대금을 받아오기도 했다. 그는 "당시 농촌에선 보기 드문 '비즈니스맨'이었던 아버지를 곁에서 지켜보면서 사람을 대하는 법과 세일즈 기법 등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었다"고 말했다.


◆"고시? 난 사업할래"

성 회장이 다시 서울로 올라온 건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좋은 대학 가려면 서울에서 공부해야 한다"는 가족들의 바람 때문이었다. 서울 사대부고를 거쳐 1966년 서울대 무역학과에 입학했다.

당시만 해도 서울 상대 출신들은 행정고시를 '패스'해 고위 관료가 되거나 월급이 후한 은행에 들어가는 게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성 회장은 첫 직장으로 가발과 스웨터를 수출하는 서울통상을 선택했다. "책상물림은 체질적으로 싫었다"는 게 이유였다. 성 회장이 입사한 1972년 당시 서울통상은 합판을 팔던 동명목재에 이은 국내 2위 수출기업이었다.

그는 입사 직후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까다롭기로 소문난 스웨덴의 모 업체를 상대로 40피트 컨테이너 7대 분량의 스웨터를 수출하는 계약을 단번에 따낼 정도였다. 성 회장은 "내가 올린 결재 서류는 담당 상무가 내용을 보지도 않고 사인할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관료적인 조직문화에 염증을 느낀 그는 2년여 만에 서울통상 생활을 접는다. 이때 걸려온 한 통의 전화는 성 회장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서울통상에서 알고 지내던 스웨덴 바이어가 "한국인 에이전트를 통해 의류를 수입하려는데 도와달라"고 부탁해온 것.성 회장은 이 에이전트와 함께 1974년 아예 제조회사를 차렸다.

성 회장의 전략은 '틈새 공략'이었다. 후발주자였던 만큼 남들이 선점한 시장에선 승산이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오리털 점퍼와 스키복이었다. 만드는 과정이 복잡한 데다 이윤도 높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경쟁이 덜했다. 그리곤 스웨덴시장을 집중 노크했다. 전략은 주효했다. 성 회장은 "섬유를 사양산업이라고 하지만 잘 살펴보면 이런 분야에서도 기회는 있다"며 "시장을 잘 선택한 덕분에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 해외는 물론 국내 거의 모든 브랜드의 다운 제품 디자인 및 제조 · 보급을 영원무역이 도맡았다"고 설명했다.


◆아웃도어에 눈을 뜨다

1984년 동업자 2명이 손을 털고 나가면서 영원무역은 성 회장이 단독 경영하게 됐다. 그가 아웃도어에 눈을 뜬 것도 이즈음이었다. OEM 방식으로 미국과 유럽 업체에 아웃도어 의류를 납품하면서 시장의 흐름을 익혔다.

미국 아웃도어 브랜드인 노스페이스를 국내에 들여온 건 1997년.국내에선 아웃도어란 용어조차 생소했던 시절이었다. 외환위기를 맞아 기존 업체들이 매장을 하나둘씩 접던 바로 그때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성 회장은 "다들 상황이 안 좋다고 말렸지만 나는 '불황에 시작하는 사업일수록 더 잘된다'고 확신하며 밀어붙였다"며 "국민소득이 높아지고 레저문화가 활성화되면 아웃도어 시장은 커질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2000년대 들어 아웃도어 시장은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고,그 과실은 오래전부터 준비했던 영원무역의 몫으로 돌아왔다. 노스페이스는 2003년 국내 아웃도어 매출 1위에 올라선 뒤 지금까지 한번도 '지존'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올해 매출은 5000억원을 넘길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성 회장은 아웃도어 시장 확대를 위해 '산꼭대기'에 있던 아웃도어를 '도심'으로 끌어내렸다. 아웃도어의 개념을 '등산할 때 입는 옷'에서 '평상시에도 입는 옷'으로 바꾼 것이다. 학생 여성 등 새로운 아웃도어 고객층을 개발한 것도 그였다.


◆도전은 계속된다

성 회장은 1년에 절반 정도를 해외에서 보낸다. 공장이 있는 방글라데시 중국 베트남을 돌며 직접 품질을 챙긴다. "답은 언제나 현장에 있다"는 지론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대 상대 출신의 성공한 기업가'란 이력서만 보면 사소한 사항까지 계산한 뒤 하나씩 실천해 나가는 치밀한 전략가처럼 비쳐지지만,실제 그의 경영 방식은 '일단 부딪히면서 해법을 찾는' 스타일에 가깝다는 게 스스로의 평가다. 성 회장은 "사업할 때 70%는 계획하지만 나머지 30%는 그냥 열어놓는다"며 "어차피 사업은 계획한 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환경변화에 따라 적절하게 변신할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라고 말했다.

환갑을 훌쩍 넘긴 성 회장에게 "언제쯤 평일에도 등산을 즐길 생각이냐"고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글쎄,하도 벌여 놓은 일이 많아서….일단 방글라데시에 1100만㎡(333만평) 규모로 조성하고 있는 한국수출가공공단(KEPZ) 사업은 내 손으로 추진하고 싶어요. 완공되고 나면 영원무역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의류 · 신발 사업장을 갖게 되는 겁니다. 영원무역 사업구조도 더 튼튼하게 재편해야 되고….당분간 등산은 주말에만 가야 될 것 같네요. "

오상헌/안상미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