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인터뷰] "주택정책, 이젠 量에서 質로 갈 때…서울 재개발에 힘 쏟아야"
"내가 주택 200만호 건설을 위해 뛰어다니던 1980년대 후반과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요즘은 서울에도 주택이 부족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주택의 양을 늘릴 게 아니라 질(質)을 높여야 합니다. "

회고록 《하늘을 보고 별을 보고》(한국일보사 발간)를 펴낸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74)는 지난 2일 서울 평창동 자택을 찾은 기자의 질문에 주저하지 않고 답했다. 거침이 없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부동산 문제에 있어선 서울 재개발을 해법으로 제시했고,정책금리는 연 3~4% 수준으로 높일 것을 주문했다. 북한 도발에 대해선 단호하게 대응하되 평화 정착을 위해 포용정책을 펴는 방안을 제시했다. 수십년간 한국의 성장과 위기를 목격한 데서 나오는 통찰력과 사고를 바탕으로 경제 정치 사회 등 다방면에 걸쳐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 박 전 총재의 막힘없는 답변은 1시간30분가량 이어졌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건강에는 문제 없어요. 지금도 팔팔합니다. 직접 운전해서 팔도를 다닐 정도입니다. 지금이 제 인생의 피크예요. 피크는 2002년 한은 총재를 맡을 때부터 시작됐지요. 남덕우 전 국무총리,이승윤 전 부총리,이봉서 전 상공부 장관 등과 함께 가끔 골프도 합니다. 보통 보기플레이 정도는 하는데,컨디션 좋으면 80대도 칩니다. 대통령 자문 국민원로회의 위원도 맡고 있습니다. "

▼회고록엔 주로 무엇을 담았습니까.

"크게 세 가지를 실었습니다. 우선 개인적으로 어떻게 살아왔나를 적었고, 제가 살아오는 동안 사회 정치 경제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살펴봤습니다. 각 시대에 뜨거웠던 이슈들,예를 들어 신도시 개발과 수도권 집중,종합부동산세,교육 등에 대한 제 생각을 담았습니다. "

▼평생 새긴 신조나 좌우명이 있습니까.

"선심후물(先心後物)입니다. 마음이 물질보다 중요하고 앞서야 한다는 것이지요. 사회 지도층은 두 가지 다 가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정신이겠지요. 저는 지금까지 물질은 남들보다 한 발 뒤처져 가고,정신은 가급적 한 발 앞서가고자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얘기해 볼까요. 1960년대부터 TV 냉장고 같은 가전제품들이 보급되기 시작했는데,저는 남들보다 늘 늦게 장만했습니다. 지금도 동료들보다 한 단계 낮은 자동차(그랜저)를 타고 다닙니다. 평생 부동산에 손을 대본 일이 없어요. 아파트 청약을 해 본 적 없고, 자식들도 못하게 했습니다. 정신은 지식, 정의실천, 사회봉사 등 세 가지를 추구했습니다. "

▼건설부 장관 시절 신도시 건설을 주도하셨는데,요즘 부동산 문제는 어떻게 보십니까.

"한국은 여전히 부동산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땅값,집값 폭등이 되풀이되면 후손들은 1인당 국민소득이 5만달러가 돼도 평생 집을 장만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투자자금이 부동산에서 금융으로 흘러가야 경제가 잘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988년과 1989년 대통령 경제수석과 건설부 장관을 할 때 신도시 건설을 통해 주택 200만호를 공급한 것도 이를 위해서입니다. 요즘은 그때와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당시엔 서울의 주택보급률이 56%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거의 100%입니다. 주택 양이 부족한 시대는 갔습니다. 이제는 질(質)이 문제입니다. 서울에서 아직도 자동차가 갈 수 없는 집이 수두룩해요. 을지로나 남산주변 등 시내 한복판에도 있습니다. 앞으로 주택정책은 나쁜 집을 헐고 좋은 집을 짓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신도시는 나쁜 집을 헐어 좋은 집을 짓는 게 아니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아요. 또 2018년부터 인구가 감소하면 신도시는 텅비게 될 겁니다. "

▼한은 총재 시절 물가와 경제회생 중 어느 쪽에 중점을 두셨습니까.

"제가 한은 총재로 있을 때는 부동산가격은 뛰는데 경기는 카드대란 여파로 꺼지고 있었습니다. 부동산을 잡는 정책과 경기를 살리는 정책은 정면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갈등을 많이 했습니다. 고민 끝에 경기를 선택했습니다. 경기는 전체 경제와 연결된 것이지만 부동산은 중앙은행으로선 부차적인 것이니까요. "

▼지금의 경제상황과 한은의 정책금리 수준은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2008년 금융위기는 20년간 이어진 선진국 경기 거품이 터진 것입니다. 선진국은 20년 동안 신자유주의적 개방경제와 중국이라는 엄청난 성장동력에 힘입어 고성장과 저물가를 누렸습니다. 물가가 낮으니 각국 중앙은행은 저금리를 유지했고 이는 유동성을 늘려 자산가격 급등을 유발했습니다. 이 같은 위기를 겪으면서 한국은 우수한 적응력을 발휘해 빠르게 성장력을 회복했습니다. 그 힘은 두 가지라고 보고 있습니다. 첫째는 1997년 말 외환위기 이후 김대중 정부의 성공적 구조조정이고, 둘째는 현 MB정부의 적절하고 건실한 회생정책에 힘입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경제상황을 보면 성장, 물가, 국제수지 세 측면 모두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내년 성장률도 4~5%는 한다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정책금리는 연 3~4%는 돼야죠.이 수준까지 지속적으로 올리는 게 바람직합니다. "

▼향후 우리 경제의 과제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앞으로 한국의 발전 목표는 '선진화'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구체적으로는 '삶의 선진화'입니다. 이제껏 한국인들의 삶의 질은 쌀 옷 자동차 같은 물질로 평가됐습니다. 경제학 용어로는 사유재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쌀이나 옷은 도둑도 안 가져 가는 시대가 됐습니다. 교육 노후보장 의료 환경 주거 교통 여가 문화 사회질서 등과 같은 공공재를 확충하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각 개인이 돈을 많이 갖고 있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함께 힘을 합쳐 문제를 풀어나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교육은 대표적인 공공재인데,한국인들은 지금까지 사유재로 생각해 왔습니다. 모두를 잘 가르치는 환경이 되어야 내 자식도 교육을 잘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공동체적 성장'이 이제 한국의 과제가 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금융감독 체계 논란이 발생했습니다.

"미국이나 영국에선 이번 위기를 계기로 중앙은행의 감독권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은행의 재무상태를 중앙은행이 더 들여다보라는 것입니다. 특히 미국은 재무장관이 이를 강력 주장했습니다. 한국에선 정부가 한은법 개정에 반대하고 있는데 이유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작년 말부터 논란이 된 한은법 개정안은 한은에 감독권을 주는 게 아닙니다. 위기가 닥쳐 한은이 돈을 투입해야 할 때 은행의 재산 상태를 보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조사권인데,실제로는 자료제출요구권 정도입니다. "

▼북한의 연평도 도발로 인해 분노가 커지고 있는데 북한 문제를 어떻게 접근해야 하겠습니까.

"북한만 생각하면 참 답답합니다. 형은 많이 배우고 잘 사는데 동생은 못 배워서 술주정하고 칼부림하는 형제가 있다고 쳐 봐요. 지금 북한은 동생이겠죠. 형이 동생과 똑같이 술주정하고 칼부림해야 하느냐….(한숨을 내쉬며)연평도 도발을 보면 북한 정권은 '미친 개'라 할 수 있습니다. 해도 너무 합니다. 무력도발엔 응분의 보복조치가 당연합니다. 그러나 전면전으로 확전되는 것은 막아야 하지 않겠어요. 상당한 인내력이 필요합니다. "

박준동 기자 jdpow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