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그룹과 '11월18일'… 인연에서 악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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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8일'은 현대그룹에 있어서 가장 특별한 날이 됐다.
이날은 현대상선의 대주주가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에서 고 정몽헌 회장으로 바뀐 날(1995년 11월 18일)이고, 국민적 염원이던 금강산 관광선 운항이 개시된 날도 다름 아닌 1998년 11월 18일이다.
그러나 2010년 11월 18일은 현대그룹이 가장 떠올리고 싶지 않은 '위기의 그 날'이 되어버렸다.
현대그룹이 현대건설을 인수하기 위해 조달했다는 프랑스 나타시스은행의 자금출처에 대한 의혹이 일었고, 바로 이날 그룹이 '무담보로 받은 문제 없는 돈'이라고 해명했다. 또 '금강산 관광을 재개할 타이밍이 왔다'고 그룹이 발표한 날이기도 하다.
현대그룹은 이후 현대건설 채권단과 인수 양해각서(MOU)를 맺었지만, 예비협상자인 현대차그룹과 채권은행단, 금융감독당국의 잇단 증빙서류 요청에도 불구하고 논란의 핵인 '대출계약서'를 당초 기한인 7일까지 내놓지 않았다.
현대그룹은 결국 채권단으로부터 현대건설 MOU가 파기될 수 있다는 '최후통첩'을 받았다. 채권단은 이번 주말을 뺀 닷새를 더 줘 오는 14일까지 '대출계약서'를 제출하지 않을 경우 MOU 해지에 대해 협의할 예정이다.
11월 18일 '위기의 그 날' 이후 현대그룹은 경영권 분쟁 가능성까지 불거졌다.
당시 시장에선 현대그룹이 현대상선 최대주주인 현대중공업으로부터 경영권 위협을 받지 않으려고 현대건설(현대상선 보유지분 약 8%)을 필사적으로 인수하려는 것으로 판단했고, 또 현대엘리베이터의 2대주주인 독일 쉰들러그룹이 장내에서 지분을 늘려나가자 현대중공업과 손잡고 현대로지엠(옛 현대택배)을 장악하려 한다는 시나리오까지 등장했다.
이렇게 경영권 분쟁 가능성의 핵심계열사로 떠오른 현대상선의 주가는 한 달 가까이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며 갈수록 변동성만 커지고 있다.
현대건설 인수자금에 대한 의문 제기는 시비를 떠나 현대그룹이 풀어내야 할 상황으로 변해버렸다. 돈을 빌린 대가를 지불했을 것이란 의혹에서 인수ㆍ합병(M&A) 과정이 꼬인 만큼 현대그룹이 '대출계약서'를 공개해 시장의 의혹을 없애는 게 유일한 해결책으로 떠오른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현대그룹이 이 계약서를 공개하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현대그룹의 주장대로 무담보·무보증 대출이라면 대출계약서 공개를 미뤄야 할 이유가 없다는 지적이다.
이 때문에 일부 M&A 전문가들은 대출계약서가 공개돼 담보 등이 제공된 사실이 드러날 경우 MOU 해지는 물론, 그룹의 경영권 분쟁이 본격화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현대그룹의 지배구조는 '현대로지엠→현대엘리베이터→현대상선→현대로지엠'으로 이어지는 순환출자구조로 이뤄져 있다. 여기서 문제는 현대상선의 최대주주가 현대중공업(KCC 지분 등 포함)이라는데 있다.
자본시장법에 따르면 상장기업 지분을 5% 이상 보유한 주주가 1% 이상 지분변동이 있거나 담보계약 등 주요 변동내역이 있을 때 이를 금융당국에 신고해야만 한다. 신고 대상인 주주가 이 규정을 어겼을 경우 해당지분에 대한 의결권은 6개월간 금지된다.
현대그룹이 만약 담보계약 등이 담긴 계약서를 내놓을 경우 현대그룹의 지배구조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더욱이 현대로지엠의 이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등기임원들 임기만료가 잇따라 다가오면서 이사선임을 위한 주주총회에서부터 의결권 다툼이 벌어질 수 있다는 분석까지 나오고 있다.
현대로지엠 분기보고서 등에 따르면 박재영 대표이사와 하종선 사내이사는 오는 12월18일, 황현택 사내이사는 내년 3월26일에 각각 임기가 끝난다.
현대그룹은 오는 14일까지 무조건 대출계약서를 제출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현대건설은 예비협상자인 현대차그룹에 넘어가게 된다. 벼랑 끝에 선 현대그룹의 선택에 관심이 집중되는 싯점이다.
한경닷컴 정현영 기자 jh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