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16주년 결혼기념일이다. 대학 4학년이었던 1990년 초에 남편을 만났으니 벌써 20년이 됐다. 그 사이 아빠를 닮은 두 딸이 태어나 엄마만큼 키가 훌쩍 컸으니 세월이 참 빠르다는 말을 온몸으로 실감한다. 원래 내 이상형은 '178㎝ 정도의 키에 아주 재미있는 사람'이었으나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배우자 선택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재미있는 얘기를 해도 잘 웃지 않아 '지금 웃어야 하는 건데'라고 웃어야 할 시점을 지적하며 어이없어 내가 웃고 말았던 기억이 무수하다.

남편은 대학원 준비를 하다 입대가 늦어져 만난 지 6개월 만에 군대에 갔다. 하숙집에서 만난 남편은 입대를 앞두고 있었던 터라 그래도 양심은 있었는지 일단 가장 친한 친구를 내게 소개시켜주는 호기를 부리기도 했다. 그러나 어쩌랴.처음 대면하고 얼마 안 있어 내 마음은 이미 남편에게 가 있었던 것을.왜 그렇게 좋았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때 소개로 만났던 남편 친구는 유학을 다녀와서 어느 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학 시절만 해도 컴퓨터가 흔하지 않아 하숙집 아주머니가 '하숙생 구함'이라는 손글씨를 써달라고 종종 부탁하곤 하셨다. 그런데 남편이 전봇대에 붙은,내가 쓴 '하숙생 구함'이란 종이를 보고 우리 하숙집에 찾아와 결국 결혼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인연은 인연이다. 남편이 하숙집에서 날 만났다고 하면 하숙집 딸이냐고 이구동성으로 물어본다고 해 많이 웃었다.

남편이 군 복무를 하는 동안 나는 고(故) 김대중 총재를 모시고 야당의 당직자로서 50년 만의 여야 간 수평적 정권교체를 꿈꾸며 참 부지런히 일했다. 제대 후 남편은 아무래도 일반 기업에 있으면 정치하는 아내 뒷바라지하기가 여러가지로 어렵다는 판단에 전문직을 가져야겠다며 공인회계사가 됐다. 고마운 사람이다. 국회의원이 된 후론 도리 없이 평일엔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지만 결혼 후 하루도 빠짐없이 남편 아침 식사를 챙겼다. 양복바지를 매일 다려 입히는 것도 지금까지 거르지 않는 일과다. 그래서 남편은 장가와서 아침을 늘 얻어먹었으니 꼼짝 못한다는 농담을 하곤 한다.

부부는 살면서 닮아간다고 하지만 우린 처음부터 느낌이 닮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남편을 처음 보셨던 부모님도 "너희가 그렇게 닮아서 만났나 보다"라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런 남편과 부부의 연을 맺은 지 16년째가 됐다.

모든 부부가 그렇지만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두 사람이 만나 서로를 이해하고 익숙해지기까지 옥신각신 아옹다옹 토닥거리기도 많이 했다. 불가(佛家)에서는 1000년에 한 번 떨어지는 낙숫물이 집채 만한 바위를 뚫는 시간을 '겁(劫)'이라고 한다. 그런데 부부는 8000겁의 인연이라고 하니 얼마나 크고 소중한 만남인가. 살면서 여러 가지로 부족한 나를 변함없는 묵묵함으로 지켜봐주고 사랑해준 남편에게 존경과 고마움의 마음을 전한다. 맛있는 저녁식사라도 하면서 지나온 세월을 추억하고 감사해야겠다.

김유정 < 민주당 국회의원 kyj207@assembly.g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