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과장은 '오늘도'다. 거래처 송년회에 얼굴을 내밀어야 한다. 김 과장의 주특기는 영업.그러다보니 거래처와 각종 모임 등 챙겨야 할 송년회가 많다. 어디가서는 코가 삐뚤어지게 술을 마셔야 한다. 다른 곳에서는 뮤지컬을 보며 한껏 우아함을 뽐내야 한다. 스포츠 송년회에 가서는 발군의 스키실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런가 하면 독거노인을 위한 김장담그기에 참가하기도 한다.

김 과장은 각종 송년회 참석을 즐긴다. 부담없이 인적네트워크를 공고히 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픈 속을 부여잡고 다시 송년회에 참석하곤 한다. 김 과장의 눈에 비친 올 송년회는 '부익부 빈익빈'이다. 관가나 공기업의 송년회는 연평도 사건 등으로 썰렁하다. 반면 증권가나 대기업의 송년회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대 호황'이다.

◆우리 송년회는 달라요

광고 회사에 다니는 진모 대리(32 · 여)는 지난 주말 스키장에서 1박2일로 직장 송년회를 했다. 낮에는 스키와 스노보드를 즐겼다. 저녁엔 고기와 통고구마를 구워 먹으면서 새해 소망을 적어 넣은 홍등을 날려보내기도 했다. 다음 날은 워터파크에서 온천욕을 했다. 진 대리 회사가 '부어라 마셔라'하는 송년회에서 벗어난 것은 2008년부터.글로벌 금융위기로 생산적인 송년회를 하자는 한 직원의 아이디어가 계기가 됐다. 진 대리는 "술을 마시며 한 해를 보내고 싶어하는 동료들도 있지만 전체적인 의견은 생산적인 송년회를 선호한다"고 말했다.

SK마케팅앤컴퍼니의 김모 대리(30) 팀은 지난해 송년회로 베이커리 강좌를 찾았다. 팀원들과 함께 크리스마스 컵케이크를 만들었다. 강좌가 끝난 후에는 맥주에 치킨을 먹는 걸로 송년회를 갈음했다.

한 외국계 L화장품사는 최근 용평리조트에서 가족 동반 2박3일 송년회를 가졌다. '한 해 동안 노고에 대해 가족에게 감사하는 시간을 갖자'는 취지였다. 임원들이 일일이 직원들의 배우자를 찾아다니며 "고맙다"고 인사해 배우자들의 감동을 자아냈다는 후문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을 강조하는 추세에 맞춰 봉사활동으로 송년회를 하는 사례도 있다. 아디다스코리아에 근무하는 전상훈씨는 "지난 금요일 하루 동안 전 직원이 4개 팀으로 나눠 김장하기와 트리만들기,쿠키만들기,아이들과 눈썰매장 가기 등 봉사활동을 하고 다같이 모여 맥주 한 잔을 하며 송년회를 했다"고 전했다.

◆여전히 '술푸는 송년회'가 다수

증권회사에 근무하는 박 모 과장(36)은 하루건너 송년회를 갖는다. 작년만 해도 증권가 연말은 썰렁했다. 하지만 코스피 지수가 2000을 넘보면서 증권가도 아연 생기가 돌고 있다. 작년에 생략했던 전 직장 송년회,특정 지점 직원 송년회 등이 올해 줄줄이 잡혔다. 2년에 한 번 갖는 모임인지라 먹는 술도 2배가량 된다. 인심은 곳간에서 나온다고 했던가. 주머니 사정이 풍족해지다보니 2차,3차가 보통이다. 박 과장은 "평소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업무인지라 증권가 송년회는 술자리 위주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자동차 부품을 제작하는 중소기업 영업직 김모 차장(37)은 12월이 가장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달이다. 거래처 관계자들이 나타나는 식당과 술집을 찾아다니며 밥값과 술값을 계산하는 게 그의 주요 업무다. 김 차장은 "연말만 되면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며 "참석자들이 권하는 술만 받아 마셔도 하루에 폭탄주 10잔 이상 마셔야 한다"고 하소연했다.

인천 남동공단의 한 공구업체에 다니는 김모 대리(33)는 "공연 보고 와인 마시는 우아한 송년회는 어느 나라 얘기냐"며 "대기업이나 외국계 회사들의 송년회 얘길 들으면 속만 상한다"고 투덜댔다. 그는 "다음 날 업무는 업무대로 해야 하는데 윗사람들이 자꾸만 3차,4차 가자고 하면 난감하기 짝이 없다"고 꼬집었다.

◆송년회 망치는 진상들은 가라

송년회를 최악으로 만드는 것은 대부분 상사들이다. 분위기 좋게 모였다가 다들 흙 씹은 얼굴로 돌아가게 만드는 '뒤끝작렬 상사'들이 주범이다. 한 해 동안 마음에 담아둔 부하에 대한 원망과 각종 스트레스를 1년치 몽땅 몰아 송년회에서 푸는 유형들이다.

국내의 한 중견기업 마케팅팀의 오모 팀장은 평소 사내에서 천사표로 통한다. 아랫사람 허물도 감싸준다. 오 팀장은 송년회 때 술기운이 오르면 "한 해 결산을 해보자"고 제안한다. 각자에게 올해 잘한 일과 아쉬운 일을 설명하게 하는 것.이때까진 오 팀장도 적극적으로 듣고 경우에 따라선 개선책을 토론하는 민주상사다.

문제는 오 팀장의 차례가 됐을 때다. 그는 1시간도 넘게 1년간 마음에 쌓아둔 부하들에 대한 구체적인 불만을 쏟아낸다. 오 팀장과 일하는 한 팀원은 "1,2월에 있었던 일까지도 상세한 상황 설명까지 곁들이며 기억해내 팀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며 "나도 잊어버린 사소한 실수를 하나하나 끄집어 낼 때면 등골이 오싹해진다"고 말했다.

송년회 실수를 1년 내내 잊지 않는 상사도 괴롭기는 마찬가지다. 유통회사에 다니는 박모 과장(37)이 속한 팀의 팀장은 악덕 폭군으로 유명했다. 지난해 말 박 과장은 팀장의 인사이동이 확실하다는 정보를 들었다. 이틀 후 송년회에서 박 과장은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다. 야자타임 때 "아,드디어 떠난다며?"라며 박장대소를 하고 만 것.하지만 팀장은 올해도 그자리에 눌러 앉았다. 박 과장은 지금까지 팀장 밑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살고 있음은 물론이다.

◆관청에서는 '112 · 119송년회'유행

중앙부처에 근무하는 이모씨의 올 송년회 원칙은 '119'다. '1차에서 1가지 술을 마시다 저녁 9시 전에 끝낸다'는 것이다. 관청의 송년회가 조촐하기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올해는 더욱 움츠러 들었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 이후 공무원들은 사실상 24시간 비상대기 체제에 접어들었다. 그러다보니 송년회를 갖기도 힘들다. 이씨처럼 사적인 송년회에 가더라도 가급적 일찍 일어서야 한다.

이씨는 "올해 관청에서는 점심을 먹으며 낮 1시에 끝내는 '111 송년회'와 '1차에서 1가지 술로 2시간 이내에 끝내는 '112송년회'도 유행한다"며 "술부담이 줄어 오히려 홀가분하다"고 말했다.

참가해야 할 송년회 수도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외국계 보험사에 다니는 권민중 대리(31 · 여)는 이달 들어 송년회가 약 20건이 잡혔다. 고객사 접대,고등학교 동창 모임 등 셀 수도 없다. 권 대리의 체력관리법은 숙취해소음료 '여O808'이다. 반면 연구소에 다니는 이모씨(34)는 "송년회라고는 직장 송년회 1개,친구들 송년회 1개 달랑 2개뿐"이라고 털어놨다.

이상은/이관우/이정호/김동윤/강유현 기자 se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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