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공영방송 NHK가 매년 12월31일 밤 생방송하는 '홍백가합전(紅白歌合戰)'은 60년 역사를 가진 송구영신 프로그램이다. 엄선된 44개팀이 참가하는 홍백가합전에 나온다는 것 자체가 인기의 상징이다. 올해는 일본에서 선풍적 인기를 모은 소녀시대와 카라 빅뱅 등 한국의 아이돌 그룹이 최소 1~2개팀은 참가할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지난달 말 발표된 참가팀엔 한국 가수가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다. 올 하반기 일본 뮤직차트 1위를 휩쓴 소녀시대가 빠진 데는 일본 언론도 갸우뚱하고 있다.

"몇 가지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는 게 NHK의 공식 해명이다. 그러나 최근 일본 가요계를 뒤흔들고 있는 K-POP(한국 가요) 선풍에 대한 견제라는 게 중론이다. 일본의 가요 시장을 한국 가수들에게 모두 빼앗길 수 있다는 지나친 위기의식에서 비롯됐다는 해석이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견제는 비단 한류(韓流)에만 그치지 않는다. 기업 비즈니스에서도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삼성은 태양전지 바이오 · 제약 의료기기 등 미래 전략산업을 위해 핵심 기술을 가진 일본 기업과 몇 년 전부터 제휴를 추진해왔다. 그러나 제대로 성사된 게 하나도 없다. 손을 잡겠다는 일본 기업이 없어서다.

삼성 관계자는 "일본 기업들과 얘기를 해보면 한국의 삼성에 이로운 걸 하고 싶지 않다는 인상이 역력하다"고 말했다. 삼성과 제휴하면 기술도 시장도 모두 빼앗길 것이란 막연한 두려움을 가진 기업도 많다고 한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 직후 미쓰이물산 파나소닉 등 일본 기업들이 한국 출장 자제령을 내리는 등 과잉 반응한 것도 마찬가지다. '컨트리 리스크'를 부각시켜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한 한국 기업을 견제하려는 심리가 작용한 것이다. 일본 언론이 연평도 포격 이후 연일 '한반도 유사시…' 운운하며 위기감을 부추기는 것도 배경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일본이 한국을 집중 견제하는 이유를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그동안 미국 유럽과 어깨를 나란히 해왔고, 앞으론 중국 정도를 신경쓰고 있던 일본에 한국은 예상 밖의 돌출 변수다. 늘 한 수 아래로 봐오던 한국이 경제 스포츠 대중문화 분야에서 턱 밑까지 치고 올라온 데 대해 일본은 자존심이 몹시 상해 있다. 한때 식민지로 지배했던 한국의 급부상을 위협으로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본이 지금 정말 견제해야 할 나라가 어딘지는 조금만 생각해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경제규모가 일본 국내총생산(GDP)의 4분의 1도 안되는 한국은 분명 아니다. 세계 2위 경제대국 자리를 내줘야 할 중국이야 말로 일본에 위협적 존재다. 중국은 경제만이 아니라 정치 · 군사적으로도 일본의 전략적 견제 대상이다. 최근 센카쿠열도를 둘러싼 중국과의 영토분쟁에서 일본은 그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을 것이다.

일본의 적지 않은 지식인들은 한국과 손잡고 중국을 견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당인 민주당의 오카다 가쓰야 간사장도 최근 한국특파원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공유하는 한국과 일본의 협력이 동북아시아 안정을 위해 매우 긴요하다"고 수차례 강조했다. 여전히 공산당 일당 독재인 중국을 함께 견제하자는 얘기다.

타당한 지적이다. 그러려면 일본은 한국과의 협력을 강화하고,한국의 성장을 도와야 한다. 그것이 일본의 국익에도 맞다. 한국을 쓸데 없이 견제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도쿄=차병석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