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칭 골드미스인 박해인씨(28)는 직장이 서울 압구정동에 있어 2년 전만 해도 옷을 살 때는 압구정동 로데오거리로 향했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차로 10분 거리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을 찾는다. 박씨는 "이국적인 분위기와 개성 넘치는 가게들에 반해 지난해부터 가로수길을 찾기 시작했다"며 "가로수길의 옷은 로데오 쪽보다 비싸지만 다양한 취향의 옷을 고를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가로수길에서 의류점을 운영하는 이동호 사장(38)도 "로데오에서 가로수길로 넘어온 디자이너들의 작업실을 겸한 의류 가게들이 소비자에게 어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3년간 신사동 가로수길이 급성장하면서 인근 압구정 역세권과 로데오거리가 영향을 받고 있다. 패션 상권으로 출발한 로데오거리는 독특한 가게와 저렴한 가격의 옷이 여성들을 사로잡았지만 임대료가 급등하면서 유명 브랜드 일색으로 바뀌었다. 고객들도 로데오의 개성이 사라짐에 따라 가로수길로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압구정 역세권에서도 카페와 음식점 일부가 가로수길로 빠져나가면서 그 자리를 성형외과가 메우게 됐다.

◆가로수길,2007년 이후 압구정동 압도

주말이면 가로수길은 인파로 북적댄다. 친구를 만나러 온 김미선씨(27)는 "1주일에 한 번은 꼭 오는 곳"이라며 "아기자기한 카페가 많아 수다 떨기 딱 좋은 곳인데다 연예인 김희선이 자주 간다는 김치찌개집도 식사장소로 그만"이라고 말했다.

가로수길은 북쪽의 압구정로와 남쪽의 도산대로를 잇는 길이 655m,폭 14m의 2차선 도로다. 2000년대 들어 해외파 패션 디자이너들이 작업실을 겸한 가게를 잇따라 내면서 패션과 디자인의 거리로 자리매김했다.

2007년부터는 유럽풍 카페와 레스토랑이 가로수길에 문을 열기 시작했다. 유동인구도 급속히 증가했다. 패션업종에 식음료가 가세하면서 원스톱 쇼핑이 이뤄지게 됐다. 장충동에 사는 대학생 김연정씨(22)는 "가로수길 메인 거리에서 쇼핑하고 뒷골목에선 식사와 술을 즐길 수 있는 식당이 많다"며 "홍대앞이나 강남역처럼 시끄럽지 않고 잔잔한 분위기여서 압구정역보다 훨씬 더 자주 온다"고 말했다.

◆'성형외과 상권'된 압구정 역세권

가로수길이 성장 탄력을 받아 급성장하는 동안 압구정 역세권의 업종 구성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식음료 가게가 줄어들면서 성형외과가 대거 몰려왔다. D공인중개법인 L대표는 "2007년 신사동과 압구정동 일대에 192개였던 성형외과가 지금은 400여개나 산재해 있다"며 "2005년 이후 명동과 청담동 일대 성형외과들도 교통이 편리한 압구정역 쪽으로 옮겨왔다"고 설명했다. 이 대표는 "이곳에 들어오려는 성형외과가 많다 보니 건물주들이 임대료를 지속적으로 올리고 이를 견디지 못하는 개인 점포들은 가까운 가로수길로 눈을 돌리게 됐다"고 분석했다.

한 업종으로 편중되는 것은 상권 전체에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특정 상권에 체류하는 시간과 이용하는 가게가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H공인중개사 사무소의 이명진 실장은 "압구정역 일대는 원래 복합상권이어서 건물 1층에 식당,2층에 카페,3층 성형외과,4층 당구장,5층 PC방 등으로 다양하게 소비자를 끌어들일 요소를 갖추고 있었지만 지금은 1층부터 5층까지 성형외과만 모아놓은 건물도 있다"고 말했다.

◆상권에 치명상 주는 점포시세

소비자가 몰리는 상권의 점포 시세가 오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점주들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임대료를 올리면 상권은 서서히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는 게 전문가들의 충고다. 압구정역 인근 H공인중개사 관계자는 "대로변 99㎡(30평) 점포는 보증금 2억원에 월세가 1600만원이며 이면도로의 유명 브랜드 커피점은 181㎡(55평) 크기의 매장 임대비가 보증금 5억원,월세 2000만원"이라고 전했다. 건물주들이 성형외과나 유명 브랜드 커피점에 매장을 임대할 때는 일반 업종보다 임대료를 20~30% 더 받는다는 설명이다.

가로수길 이면도로에서 옷 가게를 하는 P씨는 "일부 건물주와 부동산업자들의 욕심 때문에 가게 임대비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며 "백화점에도 매장이 있는 대기업 브랜드와 수입 멀티숍들이 가로수길에 범람한다면 압구정 로데오처럼 몰락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주장했다. W공인중개사사무소 대표 L씨는 "가로수길 메인도로 33㎡(10평) 매장 권리금이 2억원에 달한다"며 "가로수길에서 가장 많은 1층 33㎡ 점포 월세가 4년 전 100만원에서 지금은 350만원으로 급등했다"고 귀띔했다.

강창동 유통전문기자 cd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