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과 물가 안정은 역(逆)의 관계다. 성장을 추구하다 보면 수요가 늘어 물가가 오르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정부는 14일 발표한 내년 경제정책 방향에서 성장과 물가 안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겠다고 했다. 경기 하강 우려에도 연간 5% 안팎의 성장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유동성을 적절히 통제해 물가도 안정시키겠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내년에는 원자재 가격 상승에 따른 공급 요인뿐만 아니라 넘치는 유동성에 따른 수요 압박도 만만치 않아 인플레(물가 상승) 우려가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낙관적인 전망에 기초해 성장률 목표를 높게 잡을 경우 통화정책 등에서 물가를 효과적으로 억제할 수단이 제약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성장률 5% 달성 가능하나

정부는 내년 성장률로 5% 안팎을 제시했다. 국제기구와 국책 연구기관 및 민간 경제연구소,투자은행들이 대부분 3%대 후반~4%대 초반을 제시한 것에 비하면 낙관적인 전망이다.

정부는 그러나 장밋빛이 아니라고 했다. 근거 중 하나로 재고 조정을 들었다. 윤종원 기획재정부 경제정책국장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사업전망 불투명으로 지속적으로 감소했던 기업들의 재고가 내년에 증가세로 돌아서면서 0.5%포인트가량 성장 기여효과가 예상된다"며 "민간과 차이가 나는 부분은 이것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정부도 최근 대외경제 여건의 불확실성을 부쩍 강조하면서 '5% 내외'라는 여지를 달았다. 4%대 후반 가능성도 열어뒀다. 내년 취업자 증감도 올해의 31만명보다 3만명 적은 수준으로 전망했다. 경상수지는 올해의 290억달러의 절반을 약간 넘은 160억달러로 제시했다. 반도체와 LCD(액정표시장치) 등 주요 품목들의 수출 증가율도 올해 29.5%에서 10%대로 낮아질 것으로 예상했다.

◆물가 3% 수준 억제

내년에 5% 성장해도 물가는 3% 수준에서 묶을 수 있다고 정부는 내다봤다. 올해 2.9%(예상치)와 비슷한 수준이다. 원자재 가격 상승 등 공급 측면에서 불안 요인이 잠재해 있지만 총수요 압력은 그리 염려할 수준이 아니라는 게 정부 판단이다.

수요 측면에서 가장 큰 변수인 유동성 팽창은 미국의 양적완화 등으로 통화 공급이 늘었으나 위험기피 성향으로 실물로 돈이 본격 이동하지 않고,국내에서도 시중 유동성은 풍부하나 불확실성에 따른 자금의 단기 부동화로 물가 상승 요인으로 작용하지는 않을 것이란 설명이다. 공급 측면 불안요인인 유가도 내년에 평균 85달러(두바이유가 배럴당 기준)로 올해 78달러보다 상승폭이 제한될 것으로 전망했다.

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거시경제실장은 "세계경제 둔화 국면을 감안하면 내년 성장률 5%는 달성하기 쉽지 않겠지만 물가는 수요 압력이 크지 않아 3% 수준 내에서 통제할 수 있을 것"으로 분석했다.

◆거시정책 유연하게 운용

내년 거시정책 방향은 '유연하게' 가져가기로 했다. 재정은 내년 '상저하고(상반기 둔화,하반기 회복)'의 경기 흐름을 감안해 상반기 중 57%를 집행하고 희망근로사업 등 재정이 뒷받침된 한시 사업은 끝낼 계획이다.

가계부채는 실물경제 성장 속도보다 빠르지 않도록 관리하고 경제가 위기를 벗어난 만큼 기업 구조조정의 고삐도 죄기로 했다. 외환시장 안정을 위해 거시건전성 부과금(은행부과금) 도입 등을 추진할 방침이다.

오문석 LG경제연구원 상무는 "저금리 기조 장기화에 따른 풍부한 시중 유동성이 물가와 자산시장의 거품을 유발하지 않도록 통화 당국이 적절한 통화 · 금리 정책을 펴는 것도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정종태 기자 jtch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