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식구들을 위해 잔뜩 얻어맞으면서 물건을 훔쳐다준 적이 있었는데 물건을 받아든 엄마가 엉망진창인 꼴을 보고도 어디서 났느냐고 묻지조차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언제'라던 엄마는 한참 뒤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때 네가 모른 척 해줬으면 하는 줄 알았다. "
가족 사이란 이렇게 복잡한 것이다. 한쪽은 기억조차 못하는 일이 다른 쪽엔 굵은 대못이 돼 좀처럼 빠지지 않는다. 부모 자식 간에도 이러니 형제끼린 말할 것도 없다. 실제 형제 많은 집에서 자란 사람은 다 안다. 식구에게 받은 상처가 남이 준 상처보다 훨씬 크고 오래 간다는 사실을.
아무리 그래도 험한 세상 최후의 보루는 가족이라고 믿는 걸까,할리우드 영상물은 영화와 드라마 할 것 없이 '가족애'란 주제에 집요하다 싶을 만큼 끈질기게 매달린다. 갈등은 어쩔 수 없지만 사랑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서울 시민의 가족 응집력이 갈수록 약화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65세 이상 77.9%가 '자녀와 함께 살고 싶지 않다'고 밝히고,세대주 절반 이상이 부모 생활비에 대해 '스스로 해결하거나' 정부 · 사회가 함께 책임져줘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또 시민 33.3%가 결혼을 '선택사항'으로 여기고,혼자 사는 사람이 늘면서 다섯 집 중 한 집은 1인 가구라는 마당이다.
가족이 부서지고 있다는 얘기다. 소통 부족 탓도 있지만 생계 부담 또한 주요 원인이란 걸 보면 가족이 사랑의 대상이 아닌 부담스러운 존재로 변하고 있는 셈이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건 어쩌면 과도한 책임감 때문인지 모른다. 맨손으로도 시작하던 과거와 달리 온갖 걸 갖춰야 하니 결혼하기 어렵고,자식에게 끝도 한도 없는 애프터서비스를 하자니 부모까지 부양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믿음 아닌 경제력으로 이어진 가족은 언제 깨질지 알 길 없다. 가족이란 누가 누구를 일방적으로 책임지는 게 아니라 서로 믿고 의지하며 삶의 무게를 나누는 것임을 깨달을 때가 됐다 싶다. 자식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부담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도 틀림없고.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