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인사동과 인접한 낙원상가 도로변.지난 14일 오후 관광버스 한 대가 서자 한 무리의 외국인들이 내려 인사동으로 향했다. 이들이 인사동 초입에서 마주치는 것은 한국 전통문화가 아니다. 중 · 저가 화장품 브랜드숍들이다. 아리따움 이니스프리 등 화장품 가게가 올 들어 8개나 새로 생겼다. 한 상인은 "차 없는 거리가 되고 나서 유동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지만 정작 그 열매를 따먹는 것은 대형 화장품 업체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화장품 업체가 거액의 임대료를 부담하며 인사동 초입을 장악한 뒤 전통 공예점들은 뒷골목으로 밀려나거나 삼청동으로 떠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인사동 하면 흔히 화랑 표구점 필방 갤러리 등의 전통문화가 떠올랐지만,지금은 아니다. 인사동의 전통문화는 상업자본에 밀려 쪼그라드는 추세다. 싸구려 중국 상품이 범람하고 노점상들이 차 없는 거리의 한복판을 차지하면서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다. 인사동이 몸살을 앓는 동안 인근 삼청동의 문화코드는 소비자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이선대 롯데백화점 홍보팀장은 "슬로푸드를 즐긴 다음에 느린 걸음걸이로 산책할 만한 곳은 도심에서 삼청동이 유일하다"고 말했다.


◆'문화' 코드로 급부상한 삼청동

삼청동의 문화코드는 전통 하나만이 아니다.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강북의 가로수길'이란 평가도 받는다. 고급 레스토랑과 카페 옷가게들이 도로변에 자리잡고,그 뒤로는 잘 보존된 한옥을 리모델링한 한정식집과 전통찻집들이 즐비하다. 삼청동에 들어서자마자 마주치는 화랑들은 이 상권의 인상을 좌우한다. 화랑의 뒤를 이어 자리잡은 옷과 잡화 가게들은 점포 자체가 패션이다. 외부와 내부 치장이 예술작품 수준이다.

옷 가게 점주 L씨는 "3년 전 여기에 둥지를 틀었을 때는 한적한 곳이었는데 최근 1~2년 새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며 "TV 드라마에 거리가 자주 노출되고 서울시에서 적극적으로 홍보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카페를 운영하는 J씨도 "주말에는 내국인이 많이 찾아오고 평일엔 일본 관광객이 부쩍 늘었다"며 "삼청동은 한국과 외국의 이미지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교통과 주차가 불편한 게 단점"이라고 설명했다.

도심에서 한적한 길을 걷고 싶을 때 이곳을 찾던 사람들은 삼청동 상권의 급부상이 달갑지 않은 표정이다. 회사원 이가연씨(27)는 "직장이 가까워 자주 오는 곳이었는데 주말엔 너무 혼잡해 총리공관 뒷길의 조용한 카페를 찾게 된다"고 말했다. 대학생 김현주씨(23)도 "사진 배경으로 찍을 만한 예쁜 가게가 많고 주변 경관이 산책하기 좋아 자주 오지만 행인이 많아지면서 한적한 맛이 사라지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임대료 급등에 인사동에서 밀려난 전통가게

인사동에 관광객들이 몰릴 조짐을 보이자 임대료가 치솟기 시작했다. S부동산 관계자는 "1980년대에 33㎡(10평)당 월세 100만원짜리 매장이 1990년대에 200만~300만원으로 오르더니 지금은 900만원까지 받는 곳이 있다"고 말했다. 임대료가 고공행진을 하는 사이 전통문화 상품은 설 자리를 잃었다. 한 상인은 "화장품 가게들이 엄청난 임대료를 지불하고 들어와 호객행위까지 하는 바람에 수십년간 인사동을 지켜온 사람들이 떠나는 실정"이라고 전했다. 그는 "전통가게들이 밀려나면서 거리 모습에 실망한 소비자들이 발길을 돌리고 상권 전체가 타격을 입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삼청동도 사정은 비슷하다. 이곳에 53년 동안 거주한 D부동산의 L대표는 "10년 전 3.3㎡당 땅값이 600만원이었는데 최근엔 6000만원에 팔렸으니 꼭 10배 올랐다"며 "도로변 단층 한옥 132㎡(40평)짜리를 가게로 쓰려면 보증금 1억원에 월세 800만원을 내야 한다"고 설명했다. K부동산 J실장도 "기획부동산 업체들이 이곳에 몰려와 리모델링을 부추기고 건물주들에게 월세를 올려받도록 꼬드겼다"며 "이 바람에 시세가 급등해 한 음식점은 2층 264㎡(80평) 매장에 보증금 3억원,월세 1700만원을 주고 들어왔다"고 말했다. 그는 "좁디좁은 13㎡(4평)짜리 가게 권리금이 2억원을 호가하지만 생각보다 매출은 신통치 않다"고 덧붙였다. 이렇게 되면 자본력 있는 사업자만 상권 핵심 지역을 차지해 삼청동만의 개성을 잃게 된다는 게 J실장의 우려다. 신촌의 이대앞을 닮아가서는 생존하기 힘들다는 경고인 셈이다.

강창동 유통전문기자 cdkang@hankyung.com


◆알림=12월15일자 A24면 '서울상권 지각변동' 압구정 로데오 기사 내용 중 파스쿠찌 임대료는 3500만원이 아니라 2800만원이라고 건물주가 알려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