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회사를 차리면 크게 성공할 자신이 있었어요. 언젠가 아버지 회사도 인수하겠다고 생각했지요. "

2000년 6월 화장품 유통회사 '아이코스코리아'를 차릴 당시 한정수 서울화장품 이사(39)는 자신만만했다. 이런 자신감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 한광석 서울화장품 대표(63)의 사업을 어깨 너머로 지켜봐왔다는 데서 나왔다. 나름대로 화장품 종류나 업계 흐름을 꿰뚫고 있다고 생각한 것.서울산업대 화학공학과에 진학해 화장품 원료에 대한 학문적 기반도 다졌다. 특히 영업은 자신있었다. 대학 졸업 후 다른 화장품 회사에 입사해 3년 만에 영업소장직에 올랐다. 동기들 중 가장 빠른 승진이었다.

아이코스코리아의 첫해 성적표는 기대 이상이었다. 매출은 6억원이었지만 순이익률이 20%에 달했다. 대형마트에 제품을 납품하면서 새로운 판로를 뚫었던 게 주효했다. 그는 '품목 수를 조금만 더 늘리면 금방 큰 회사를 만들 수 있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독자 브랜드를 출시하고 품목을 10여개에서 50여개로 늘렸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결과는 좋지 않았다. 매출은 60억원으로 늘었지만 이익은 거의 남지 않았던 것.사무실 임대료라도 줄여보자는 생각에 2004년 인천 남동공단에 위치한 서울화장품 본사로 회사를 옮겼다. "돈 벌어서 아버지 회사를 인수하겠다는 포부로 사업을 시작했는데 아버지 회사에 세들어 사는 신세가 됐으니 자존심이 무척 상했죠."

◆불편한 더부살이로 경영수업 시작

어쩔 수 없이 시작한 더부살이가 가업승계의 계기가 될 줄은 몰랐다. 처음에는 사무실만 빌려썼지만 자연스럽게 아버지 일을 하나 둘씩 돕기 시작했다. 한 이사는 "50개 품목을 유통하는 데도 쩔쩔매는데 아버지는 연 800개 품목의 화장품을 개발 · 제조 · 유통하고 있었다"며 "어렸을 때부터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아버지를 꼽아왔지만 가까이에서 아버지가 사업하시는 모습을 보니 훨씬 배울 점이 많았다"고 말했다.

한 대표는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사업가다. 1970년대 수입화장품 판매업에 종사하던 한 대표는 업계에서도 소문난 영업맨이었다. 화장품 제조업에 뛰어든 것은 1982년 염색약 파마약 등을 생산하던 서울향장을 인수하면서부터다. 한 대표는 "적금을 깨고 집을 팔고 사채까지 끌어와 시작한 화장품 제조업이었기 때문에 이를 악물고 일했다"며 "영업을 하며 얻은 감각으로 소비자가 원하는 제품을 적시에 내놓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국내 최초로 선보인 뿌리는 형태의 헤어스프레이 '미모나라라'가 히트를 치면서 사업이 본궤도에 올랐다"며 "이 제품은 월 20만개씩 팔려 주문량을 공급하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이후 서울화장품은 염색약,파마약,스프레이 등 독자 브랜드를 선보이며 헤어제품 업계를 선도했다.

한 대표는 "헤어제품 업계에선 선두자리에 있었지만 2000년대 중반 들어서면서 성장에 한계를 느꼈다"고 말했다. 국내 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르고 값싼 중국산 염색약 등이 몰려들어왔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부자 간 대화가 잦아졌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신사업 아이디어를 얻고,아들은 아버지에게 사업 노하우를 묻는 경우가 늘어났다. 한 이사는 더부살이를 시작한 지 2년째인 2006년부터 정식으로 회사에 입사해 경영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올해 '300만달러 수출탑' 수상

타고난 영업맨이었던 아버지가 처음 아들에게 맡긴 일 역시 영업이었다. '중국 동남아 등 새로운 시장을 찾아야 한다'고 여긴 한 대표는 아들에게 해외영업을 전담시켰다. 한 이사는 "2006년 당시 수출이 전무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해외영업부 자체가 없었다"며 "중국 베트남 등 현지를 다니며 해외 바이어들을 설득했다"고 말했다.

그는 "왓슨스,마닝 등 세계적인 유통업체들을 거래선으로 확보하면서 수출이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한 이사는 필리핀의 유명 백화점을 방문했다가 랑콤,디올 등 명품 화장품들 사이에 서울화장품 제품이 전시돼 있는 것을 보고 눈물이 나올 뻔했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이 회사는 2008년 100만달러수출탑을 수상한 데 이어 2년 만에 300만달러수출탑을 탔다.

급속도로 성장하는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제조업자개발생산(ODM) 시장에 발빠르게 대응해 새 판로를 개척했다. 한 이사는 "더페이스샵,스킨푸드 등이 무섭게 성장하는 것을 보고 이 시장에 진출하는 게 필요하다고 느꼈다"며 "염색약 등 헤어제품 외에도 스킨케어,보디용품 등을 ODM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부분 매출이 헤어제품에서 나왔던 이 회사는 현재 매출의 50%를 ODM에서 벌어들이고 있다. 사업포트폴리오를 잘 구성한 것.이 회사는 현재 헤어제품 외에도 보디용품,스킨케어 제품 등을 생산하고 있다. 자사 브랜드 뚜라비,예그리나,인퓨어,뷰티세이브 등이 150여개의 대리점을 통해 판매되고 있다. 더페이스샵,스킨푸드 등에 자사브랜드(PB) 상품을 납품하고 있다. 올해 매출은 200억원에 달할 전망이라고.

◆父 "항상 정직하게 사업해라"

한 이사는 "5년째 경영수업을 받고 있지만 아직도 배울 게 많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는 100원짜리 원자재를 70원에 살 정도로 가격협상에 능하다"며 "지금도 고객 네트워크가 탄탄하다"고 덧붙였다.

한 대표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는 다른 노하우는 없다"며 "항상 정직하게 사람을 대하면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서울화장품은 원재료를 납품하는 업체가 100여개,제품을 파는 대리점이 150여개에 달한다"며 "이들과 거래하면서 이해가 부딪히는 경우,속이면 이익을 더 얻는 경우가 많은데 항상 정직하게 대해야 평생 파트너,평생 고객으로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남동공단(인천)=심은지 기자 summi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