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중앙은행(ECB)이 재정위기를 유로존(유로화 사용 16개국)의 금융시스템과 단일통화체제를 흔들 수 있는 최대 위협으로 꼽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ECB의 최우선 과제도 인플레이션 억제에서 재정위기 대응으로 변하고 있다"(독일 경제일간 한델스블라트)

그리스 아일랜드를 거쳐 스페인 포르투갈 벨기에로 번지는 유로존 재정적자 위기가 글로벌 경제의 최대 암초로 지목되는 가운데 재정위기 대처의 선봉에 선 ECB의 역할에 관심이 집중된다.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단일 경제시장인 유로존의 통화정책을 전담하는 ECB는 유럽 경제통합의 상징으로 꼽혀왔다.

유럽 최대 경제대국 독일 중앙은행(분데스방크)을 모델로 만들어진 ECB는 그동안 통화정책에서는 분데스방크와 유사하게 '물가안정'을 최우선 목표로 잡아왔다. 그러던 ECB가 유럽 재정위기가 불거진 이후에는 'PIGS(포르투갈 아일랜드 ·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라는 유로존 변방국의 국채를 대량 매입하며 재정위기에 맞서는 '소방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유럽 재정위기에 몸집 두 배로 키운 ECB

재정적자 위기가 유로존 변방으로 급속히 번지고 있지만 유럽연합(EU)이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던 16일 ECB는 자본금을 현재(58억유로)의 약 두 배인 107억6000만유로로 확충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ECB는 프랑크푸르트 ECB 본부에서 이사회를 가진 뒤 발표한 성명에서 "최근 환율과 금리,금가격,신용리스크 등의 변동성 확대에 비춰볼 때 자본금 확대가 적절하다고 판단한다"며 "이달 29일 증자가 시작돼 2012년 말까지 증자작업을 마칠 것"이라고 설명했다.

재정적자와의 전쟁 최전선에 나선 ECB를 위한 '실탄 확보'에 유로존 각국이 큰 이의 없이 지원하고 나선 것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2009년 유럽 재정위기에 대응하느라 ECB가 적잖은 손실을 본 데다,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유로존 회원국의 국채매입과 향후 추가적인 위기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선 ECB의 증자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 ECB는 재정위기 대처에 EU가'한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유로존 변방국 국채를 꾸준히 사들이며 유로존 안정화에 기여해 왔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글로벌 금융시장은 ECB 증자를 ECB에 'PIGS'국채 매입에 따른 충격을 완화하는 완충재를 마련해 주는 것으로 해석한다"고 분석했다.

ECB가 출범 12년 만에 처음으로 자본을 확충하자 글로벌 금융시장에선 ECB의 유로존 변방국 국채 매입 프로그램이 더욱 탄력을 받을 것이란 기대가 커지고 있다. ECB는 올해 5월 재정위기에 빠진 그리스 금융지원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유로존 재정적자 대책의 핵심기관으로 움직이고 있다. 5월 이후 ECB가 그리스와 포르투갈,아일랜드,스페인 국채를 사들인 규모만 해도 720억유로에 이른다.

FT는 "유로존이 부유한 북유럽 국가들과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남유럽 국가로 나뉘어 통일된 대책을 신속하게 내놓지 못하고 있다"며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같은 국가에 전면적인 구제금융을 실시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ECB의 변방국 국채 매입이 현재로선 효율적이면서도 유일한 위기대처 방안이다"라고 진단했다.

일각에선 최근의 ECB 행보를 두고 ECB의 주목적이 '인플레 방지'에서 '재정위기 대처'로 바뀌었다는 평도 나온다. 그동안 ECB는 홈페이지에 "물가안정을 유지하는 것이 최우선 목표(primary objective)"라고 명시할 정도로 인플레와의 전쟁을 중시해 왔지만 이제 최우선 과제가 재정적자 위기 대처로 바뀌었다는 설명이다. 이 같은 ECB의 재정위기 대처 노력이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장 클로드 트리셰 ECB 총재는 "ECB의 유로존 변방국 국채매입이 재정위기 우려를 조금 더는 효과는 있지만 근본적이고 항구적인 대책은 유럽 각국 정부가 해법을 내놔야 한다"고 말했다.

◆EU의 아킬레스건은 재정정책 불일치

ECB는 유럽 경제통합의 상징적 기관으로 꼽힌다. 유럽 경제통합의 최종 단계는 1999년 유로화 도입에 따른 단일통화 사용이라 할 수 있고,단일통화 출범 이후 EU의 통화정책을 담당하는 기구가 바로 ECB였기 때문이다.

ECB는 △통화안정 △이자율 설정△유로화 발행 △유로화 관리 등 유럽단일통화와 관련된 사안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진다.

ECB는 1998년 유로화 사용을 결정한 11개국이 ECB 총재와 부총재,그 밖의 4인의 이사로 구성된 집행부를 선출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현재 ECB 집행부는 6인으로 구성돼 있으며 임기는 8년으로 ECB 운영의 최고 책임을 맡고 있다.

ECB는 독일 모델을 채택한 만큼 통화정책에서 대단히 강한 독립성을 보장받는다. 마스트리흐트조약에 따라 ECB는 EU의 기구나 개별 국가 정부로부터 어떤 지시도 받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으며,총재 임기도 확실히 보장된다.

기능과 역할에서의 한계도 적지 않다. 유럽중앙은행체제는 ECB와 EU회원국 중앙은행 총재들의 모임이라는 이원 구성으로 돼 있다. ECB의 정책결정 과정도 집행부 외에 관리이사회와 일반이사회 등 세 기구로 나눠져 있다.

ECB의 문제라고 지적하기 어려운 면은 있지만 유럽통합 과정에서 통화정책은 단일화하면서 재정정책을 일원화하지 못한 것도 문제다.

월스트리트저널은 "EU가 ECB를 통해 통화정책은 통일했지만 재정정책은 각 회원국 소관으로 남겨놓은 점이 유럽통합의 아킬레스 건"이라고 비판했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