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연일 야수의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연평도 포격으로 우리 모두를 놀라게 한 지 며칠이 지났다고 협박과 위협을 해대는가. 요즈음 그들이 밤낮으로 불량배국가처럼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는 폭언과 전쟁위협은 8개월 전 천안함 폭침사건과 더불어 우리가 그동안 누려왔던 평화가 얼마나 살얼음 같은 부질없는 평화였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우리는 전쟁과 긴장을 잊고 살았다. 그러다보니 안보조차 잊혀진 언어가 되었다. 이처럼 안보조차 잊고 산 데는 햇볕론자들의 잘못이 크다. 그들은 연평도 포격사건이 일어나자 햇볕정책이 시행되던 김대중 · 노무현 정권 때가 평화시기였다고 주장한다. '대북 퍼주기'를 한 결과 평화가 정착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잘못된 인식도 없다. 제1차,2차 연평해전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 햇볕정책 시기였는데도,"서해바다 이상없다"고 강변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에리히 레마르크의 소설 《서부전선 이상없다》가 떠오른다. 1차 세계대전 중 어느 날 전투는 소강상태이고 날씨도 쾌청했다. 독일 병사들은 전쟁 중이라는 것도 잊고 누군가 부는 하모니카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 중 한 병사인 파울도 눈으로 나비를 쫓고 있다. 나비가 평화처럼 생각된 것이다. 참호에서 몸을 일으켜 나비에 손을 내미는 순간 저격병의 총격에 파울은 죽는다. 하지만 그날 전선은 조용했다. 독일의 전선사령부는 본국에 '서부전선 이상없다'는 전문을 보낸다. 햇볕정책 시기 중 전사자들이 발생했는데도 평화상태인 것처럼 국민들에게 선전했으니,말만 평화였던 것이다.

또 하나 햇볕론자들이 잘못한 것이 있다. 우리와 북한의 관계를 '해님과 나그네의 관계'라고 하면서 햇볕을 보내면 북한이 그 호전성을 벗어버리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남북관계는 '늑대와 양의 관계'다. 늑대는 물가에서 어린 양을 만나게 된다. 양을 잡아먹을 생각이 난 늑대는 작년에 욕을 하고 도망갔다고 엄포를 놓는다. 양은 자신이 금년에 태어났다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물을 흐려놓는다고 트집을 잡자 양이 울먹이며 대답한다. "저는 늑대님보다 강물 아래쪽에서 물을 마시는데,어떻게 물을 흐리게 할 수 있나요. "낭패를 본 늑대는 드디어 "배가 고픈데 말이 많다"고 하며 양을 잡아먹고 말았다.

이처럼 북한은 늑대고 한국은 양이었던 것이다. 물론 북한은 때때로 '양의 탈'을 쓴 늑대였다. 그래서 쌀과 비료,돈을 갖다 주면 양의 탈을 쓰기도 했으나 늑대의 본성은 어쩌지 못해 금강산 관광객을 쏘아 죽이기도 했다. 북한을 자극한다고 하여 인권문제도 침묵하고 '납북자'나 '미송환된 국군포로'라는 용어도 쓰지 않으며 '주적'개념도 뺐는데 북한은 더욱더 호전적이 되었다. 인권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결과 북한 주민의 인권을 억압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해 우리 땅에 포탄을 쏘아 연평도 주민의 인권까지 무참히 침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국은 양이긴 한데,'늑대의 탈'을 쓰지 못하고 항상 '양'으로만 남아 있는 순진한 양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북한이 핵실험을 하고 미사일을 쏘아도 우리는 당근만을 채찍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상호주의라도 하려고 하면 "전쟁을 하자는 거냐"면서 좌파진보진영의 고집했고 사람들이 대들기도 했다. 그들은 '평화론자'라고 하면서도 정작 평화를 깨는 북한에 대해서는 평화를 외치지 못하고 대한민국에 대해서만 평화를 외쳤을 뿐이다.

왜 양은 '늑대의 탈'을 써서는 안되는가. 시도 때도 없이 위협하는 북의 도발에 대해 비굴한 평화를 외치는 것은 자유인의 태도가 아니다. 지금이야말로 이런저런 이유로 양을 괴롭히며 온갖 위협을 가하는 늑대의 만행에 결연히 맞설 때다.

박효종 < 서울대 정치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