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방문을 마치고 21일 중국으로 온 빌 리처드슨 미국 뉴멕시코 주지사는 이날 베이징 공항에서 기자들에게 "북한이 남한의 연평도 사격훈련에 대해 이전에 공언했던 보복공격을 하지 않은 것은 향후 대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매우 중요한 진전"이라고 말했다.

리처드슨 주지사는 북한 측이 △IAEA 핵사찰단의 복귀 △핵연료봉의 외국 반출 △1만2000개의 미사용 연료봉 해외 판매 △남 · 북 · 미 3국 간 분쟁지역 감시 군사위원회 설치 △남북 군사 핫라인 구축에 동의했다고 전했다.

우리 정부는 북한의 난데없는 '패키지 제안'에 대해 진정성에 의구심을 표하며 평가절하하는 분위기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자신들의 핵 개발 정당성을 인정받으려는 속셈"이라고 분석했다. IAEA 사찰단 복귀 허용이 오히려 북한의 핵활동을 외부에 선전해줌으로써 핵개발을 정당화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이 당국자는 "국제적으로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IAEA 사찰단의 감시 아래 할 수 있는 나라는 몇 안 된다. 우리나라도 안 된다"며 "이미 낡은 카드"라고 지적했다. 이어 "진짜 사찰을 받으려면 그 전에 핵확산방지조약(NPT)에 다시 들어와야 하며 NPT에 돌아오려면 모든 핵 프로그램의 동결과 철회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이 진정성을 얻으려면 먼저 핵시설 가동부터 중단하고 핵사찰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 미사용 연료봉의 해외 판매(외국 반출) 제안과 관련,"핵 연료봉 문제는 이미 2008년 정부와 북한 간에 대화가 오갔던 것"이라며 "핵문제의 초점이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UEP)으로 넘어간 현 시점에서는 '의미없는 낡은 카드'"라고 강조했다.

외교 소식통들은 북한의 패키지 제안이 당장의 군사 · 외교적 대치 국면을 대화 국면으로 전환시키는 데는 역부족이지만 6자회담 재개에 적극적인 중국 러시아의 행보와 맞물리면서 차츰 동력을 얻어갈 수도 있을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연말연초의 조정기를 거치면서 북한의 성의있는 행동 표시 여부와 관련국들의 반응에 따라 정세의 틀이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다음 달 중순의 미 · 중 정상회담이 국면 전환의 중요한 분수령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정부의 한 소식통은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이 추가 도발을 하지 않음으로써 여건과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라며 "회담 재개의 조건은 어느 정도 유연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장진모 기자 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