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특히 '동반성장''상생''융합''개방형 혁신(Open Innovation System)' 등의 말들이 무성했다. 이 틈을 타 정부 각 부처는 저마다 새로운 법과 제도를 도입하겠다고 나선 한 해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무슨 특별한 법이나 제도가 없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동반성장 등이 잘 안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럼 선진국은 왜 잘 되느냐고 하겠지만 아이디어가 제대로 보호되고 시장에서 공정한 경쟁이 이뤄진다는 것,그 결과 신뢰가 쌓이고 협력문화가 생겨나 동반성장 등이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을 뿐이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아이디어 보호,공정한 경쟁 등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부분에 있다는 얘기다. 이는 달리 말하면 특허청과 공정거래위원회 정도만 남기고 다른 부처들은 다 없애도 선진적인 기업환경 조성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의미다. 물론 그 양 부처가 제 역할을 똑바로 한다는 전제하에서다.

정운찬 전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한 동반성장위원회가 출범했다. 위원으로 참여한 어느 대기업 관계자는 첫날 회의에서 "이 위원회의 법적근거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런 질문이 나올 만하다. 동반성장위원회는 엄연히 민간기구라면서도 대통령 업무보고를 보면 이 위원회를 통해 지식경제부는 동반성장지수를 내년부터 발표한다고 하고,중소기업청은 중소기업을 보호한다는 취지하에 소위 '중소기업 적합업종'을 선정해 고시한다고 한다.

동반성장위원회를 내세운 것은 정부가 직접 나서서 그런 일을 하기에는 뭔가 꺼림칙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런 측면이 있다면 아예 처음부터 무리한 일은 벌이지 않는 게 가장 좋다. 민간자율을 가장해 정부가 뒤에서 직접적인 규제와 다름없는 권한을 행사하겠다는 것은,차라리 정부가 전면에 나서는 것보다 더 나쁜 선택이다.

정부가 동반성장이라는 단일지수를 통해 점수를 매겨 어떤 대기업이 잘하는지 줄을 세우겠다는 발상도 마치 우리 학교 교육의 문제점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공정위의 '공정거래 및 상생협력 협약평가',지경부의 '상생협력지수',그리고 이른바 '이민화(전 기업호민관) 사퇴 파동'을 초래한 '호민인덱스' 등을 깡그리 모아 동반성장이라는 이름의 막강한(?) 단일지수를 정부가 만든다지만,그럴수록 더 '형편없는 지수(dirty measure)'로 전락할 가능성만 높아진다. 정부 말대로 동반성장지수가 정말 대기업-중소기업의 '윈-윈(win-win)'인덱스라고 한다면 대기업들이 자기 기업에 적합한 지표를 골라 내부적으로 적극 활용하는 게 제일 바람직할 것이다.

정부가 내심 동반성장지수 발표를 통해 대기업들에 심리적인 압박을 가하겠다는 의도라면 앞으로 중소기업 적합업종 선정제도의 운영이 어떻게 될지도 뻔하다. 벌써 중소기업들로부터 자신의 사업분야를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지정해 달라는 신청을 받아 동반성장위원회가 가부(可否)결정을 내리면 이를 정부 고시로 지정하겠다는 얘기가 나돌고 있다. 이미 폐지된 중소기업 고유업종 제도가 결국 중소기업의 경쟁력만 떨어뜨리고 말았다는 뼈저린 교훈을 정부는 까맣게 잊은 모양이다.

진흥을 말하는 정부 부처들이 돈 나눠 주는 재미만으로는 부족해 민간자율을 가장한 규제까지 행사하겠다는 것은 아닌지 정말 걱정스럽다. 선진적인 기업환경이 멀게만 느껴진다.

안현실 논설위원ㆍ경영과학博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