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인들의 삶의 자취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언제나 흥미롭다. 그들의 예술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산자수려한 고창은 신재효 서정주 김소희 등 숱한 예인들을 낳았다.

모양성 앞 신재효 고택을 여정의 첫머리로 삼는다. 신재효(1812~1884)는 판소리 여섯 바탕의 사설을 정리하고 집대성함으로써 판소리를 처음으로 체계화했다. 1850년(철종 1년)에 지은 신재효 고택은 연못과 정자를 포함한 9917㎡(3000평) 크기 정원에 건평 991㎡(300평)의 거대한 저택이었다고 한다.

일제는 연못을 메우고 그 자리에 경찰서를 세워버렸다. 지금의 신재효 생가 사랑채는 일제강점기 이래 경찰서 사택으로 쓰였던 건물을 초가집으로 '복원'한 것이다. 정면 6칸,측면 2칸의 사랑채 방안에는 동리가 북장단을 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장면이 밀랍인형으로 재현돼 있다. 인형들이 금방이라도 이날치 정창업 등 소리꾼들로 변신해 구성지게 판소리 한토막을 토해낼 것만 같다.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 따르면 신재효는 사서삼경과 제자백가를 무불통섭한 사람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판소리는 토막소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일찌감치 쇠락했을는지 모른다. 원래 신재효 생가가 있던 자리에 들어선 판소리박물관으로 걸음을 옮긴다. 신재효 개작 판소리 성두본(적벽가)과 흥선대원군이 쓴 편지 등이 흥미를 돋운다.


●질마재 아래 미당시문학관 · 미당 생가 · 외할머니댁

풍천장어로 알려진 인천강을 지나 미당 서정주(1915~2000)의 고향인 부안면 선운리 진마 마을에 닿는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온 서정주는 민족어 고유의 특성을 살린 뛰어난 시편들을 남겼다.

소요산(444m) 자락 아래 폐교한 선운분교를 리모델링한 미당시문학관 중앙의 타워가 기념비처럼 우뚝하다. 1층 전시실로 들어서자 '국화옆에서' 등의 낯익은 시들과 '마쓰이 오장 송가'를 비롯,미당이 '정치와 전쟁세계에 대한 내 무지와 부족한 인식' 때문에 썼다고 고백했던 친일시들이 객을 맞는다.

층마다 전시된 고무신,돋보기 안경 같은 미당의 애장품과 육필 원고,작품집들을 들여다보노라니 어느새 6층 옥상에 이른다. 옥상 벽에 난 둥근 창과 네모난 창을 통해 미당의 생가와 미당의 묘소가 있는 안현마을을 바라본다. 너무 평화로운 나머지 실경(實景)이 아니라 액자에 담긴 한폭의 풍경화 같다. 제이 애플턴이 그랬던가. 자기 몸을 드러내지 않고 풍경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 가장 좋은 조망점이라고.문학관 마당의 스테인리스로 만든 '바람의 자전거' 앞에 선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라 했던 미당의 시구를 형상화한 조형물이다. 시문학관에서 몇 걸음만 더 가면 미당의 생가다. 미당이 아홉 살무렵 부안 줄포보통학교에 입학하려고 이사 가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다.

헛간채 벽에는 아이들이 오목새김한 '♡' 표시가 그득하다. 미당이 살아있다면 시의 모티브가 될 만한 낙서들이다. 생가 아래 초가집에는 서울서 내려온 지 1년 반이 됐다는 미당의 아우 서정태씨(88)가 살고 있다. 서옹과 잠시 미당의 친일에 대한 얘길 나눴다. 그 역시 "친일은 형의 생애에서 가장 큰 오점이자 오욕"이라며 안타까워했다.

마을 입구의 의자 형태의 모뉴멘트 옆 정미소건물 뒤에는 미당의 외할머니가 살던 초가집 터가 있다. '어머니도 그네 꾸지람을 가지고 올 수 없'(시 '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어 어머니의 꾸지람을 피해 도망오곤 했던 외할머니집 뒤꼍의 툇마루는 미당의 안식처(shelter)이면서 미당 문학의 발원지였다.

●벽화가 아름다운 안현마을과 인촌 생가

안현 마을 뒷산에 있는 미당의 묘소를 찾는다. 건너편 진마 마을에서 얼씬거리는 개미 한 마리의 움직임마저도 포착할 수 있을 듯한 이곳에 미당은 제 스스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한송이 국화꽃으로 잠들어 있다. 무덤이야말로 자신의 온 생애를 비출 수 있는 방대한 거울이다. 안현 마을은 주민의 실제 얼굴이 그려진 벽화가 푸근한 마을이다. 경로당 아래 공터에선 청국장 콩 삶기가 한창이다. 담너머로 김장하는 풍경을 찍노라니 그러지 말고 들어와서 김장김치 맛도 좀 보고 가라고 성화다.

김소희 생가로 가는 길.신기 마을 앞에서 '동학접주 손화중 장군 피체지'라는 표지판을 만난다. 나주성 싸움에서 패한 뒤 도망다니던 손화중은 이 어름의 이모씨 재실에 숨어 있다가 재실지기의 고발로 체포당하고 말았다. 봉암리에는 제2대 부통령을 지낸 인촌 김성수(1891~1955)의 생가가 있다. 1907년 인촌이 부안 줄포로 이사하기 전까지 살았던 집이다. 1880년대에 지은 이 집은 한 구역 안에서 큰댁과 작은댁이 각각 독립적인 생활을 했던 어마어마한 규모다. 어찌나 큰지 구경하는 사람이 질릴 지경이다. 마름 없는 집을 인촌가 남자들의 축소판 동상들이 지키고 있다.

●조선백자처럼 아정한 그의 소리를 그리워하며

흥덕의 옛 지명은 흥성이다. 흥성 동헌을 거쳐 사포리 김소희 생가에 닿는다. 45가호가량이 사는 마을의 끄트머리에 있는 생가는 정면 4칸,측면 한 칸의 'ㄱ'자형 안집과 헛간채로 이뤄진 초가집이다. 띠살문을 단 방문이 내 어린시절의 고향집을 연상케 한다. 툇마루에 놓인 방명록이 홀로 집을 지키고 있다. 굳게 닫힌 부엌문 틈새로 안을 들여다보니 살강에 사기그릇이 포개져 있는 것이 보인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고수면은 사기그릇 생산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맑고 고운 애원성을 타고난 김소희(1917~1995)는 송만갑 정정열 박동실 등 당대 명창들에게서 판소리를 배우면서 명창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창극좌 입단(1937),여성국악동호회 조직과 한국민속예술학원 창설(1945),중요무형문화재 기 · 예능 보유자로 지정(1964),국악협회 이사장(1993) 등을 거치면서 일생을 국악 발전에 바쳤다.

그는 서예 · 가야금 등에도 능했던 절대가인이었지만 실제 삶에서도 언제나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당당하게 처신했던 사람이었다. 깐깐하기로 호가 난 명고수 김명환(1911~1989)조차도 그에 대해서만은 "소희씨 마음 넓은 사램이여.목청 기맥히게 좋고.(《내 북에 앵길 소리가 없어요》)"라고 평할 정도다. 그가 부르는 동편소리는 스케일이 크면서도 아기자기하고 우아하다. '심청가' 중 '범피중류' 대목과 '춘향가' 중 '적성의 아침' 대목이 특히 그렇다. 동시대를 살면서 그의 소리를 귀동냥할 수 있었던 것은 커다란 행운이다. 지금도 LP에 녹음된 그의 '구음'을 듣노라면 가슴 한복판으로 비애가 한줄기 대바람 소리처럼 스쳐 지나가곤 한다. 그처럼 단아한 정신에서 나오는 고고한 소리를 어디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자신이 불렀던 단가 '역려과객(逆旅過客)'의 한 구절처럼 "일월산하는 지금도 의구하되 인물사업은 자취를 못 볼세라" 한탄할 뿐이다. 나그네의 애틋한 심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마당가 감나무들은 아직 떨어지지 않은 작은 똘감(돌감)들을 매단 채 묵묵히 발부리만 내려다보고 섰을 뿐이다.

안병기 < 여행작가 smreoquf@hanmail.net >

■ 맛집

전북 고창군 흥덕면 동사리 흥성회관(063-564-8864)은 입 큰 생선 대구 대가리를 조리한 '볼태기' 요리가 맛있는 집이다. 볼태기는 입이 큰 대구의 볼살을 말한다. 이 집의 볼태기탕은 들깨 가루를 갈아 넣어 시원하면서도 구수하다. '어두육미(魚頭肉尾)라는데/ 꼬리만 먹고/ 머리는 놔 두었다/ 이것은 홍도에서 잡혀 목포에 갔다/ 다시 홍도로 돌아온 송장 물고기/ 어두육미라는데/ 두뇌는 놔 두고/ 꼬리만 먹었다/ 그 머리에는 아직/ 향수가 남아 있기에/ 그랬다. ' 이생진의 시 '어두육미'를 떠올리면서 부추 숙주 홍고추 파 마늘 등을 넣고 대구뼈로 우린 육수로 끓여낸 볼태기탕을 드실 일이다. 볼태기탕·볼태기찜 2만원부터.


■ 여행 팁

1200여㏊에 이르는 갯벌을 앞치마처럼 두른 심원면 하전 마을은 전국 최대 바지락 생산지로 이름난 곳이다. 하전갯벌체험장에선 방학을 맞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경운기를 이용한 갯벌택시타기,바지락 캐기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준비돼 있다. 안내센터에서 받은 장화를 신고 진흙투성이가 되도록 신나게 갯벌을 누비면서 바지락을 캐 집에 가져갈 수도 있으며 바닷가 생물들도 잡을 수 있다. 참가비는 어른 1만원,어린이 7000원.찾아가는 길은 서해안고속도로→선운산 IC→서정주시문학관→선운사→심원면 하전 갯벌체험마을.홈페이지(hajeon.invil.org).문의 (063)563-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