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옥수동 언덕배기의 빌라.보통 키에 다부진 체구의 '오페라 거장'이 손을 내민다. 세계 최정상의 베이스로 꼽히는 연광철 서울대 음대 교수(45).40대 중반인데도 머리가 백발에 가깝다. 20년간 해외 무대에서 극찬을 받은 이면에 얼마나 많은 고뇌가 있었는지….피아노가 없어 종이 위에 건반을 그려놓고 연습하던 고3 시절부터 그의 머릿속에는 음악만 들어있었던 듯하다.

올해 서울대에서 첫 강의를 시작한 그는 '초짜 교수'의 진지함과 '성악 대가'의 노련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아이패드에 빼곡히 적힌 그의 공연일정도 놀라웠다.

그는 크리스마스 직후인 27일 출국해 30,31일 독일 베를린 송년음악회 무대에 선다. 베를린 방송교향악단과 베토벤 교향곡 9번을 협연할 예정이다. 새해 첫날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오페라 '파르지팔',2월10일부터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를 공연한다. 3월에 서울로 돌아와 강의하고 4월 독일 뮌헨의 '파르지팔',6월 뮌헨의 '아이다' 공연에 이어 7월부터 8월까지는 바이로이트 바그너 페스티벌에 참가한다. 9월에 귀국했다가 10~11월 프랑스 파리에서 '운명의 힘',연말 이탈리아 밀라노의 라스칼라극장에서 '돈 조반니' 공연을 갖는다. 그 사이에 5월17~18일 호암아트홀에서 '베이스 연광철 리사이틀'도 연다.

그 중에서도 단연 관심을 끄는 것은 바이로이트 바그너 페스티벌이다. 바그너 오페라의 성소로 불리는 이곳에서 1876년에 시작된 클래식 최고의 축제.관객들이 8~10년을 기다려야 티켓을 구할 수 있다. 그만큼 평가도 냉혹하다. 유명한 성악가들도 매년 초청받기 어렵다. 그런데 그는 15년째 이 무대를 빛내고 있다. 딱 한 번,배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가 퇴짜를 놓은 해만 빼고.

"2002년에 공연할 '탄호이저' 오디션이 1999년에 있었어요. 한동안 연락이 없다 2001년 계약서가 왔는데 비중이 낮은 역이더라고요. 내가 이 역을 받아들이면 더 큰 역은 물 건너가는 것 같았죠.그래서 그냥 계약서를 돌려보냈습니다. 그랬더니 두 달 만에 계약서가 다시 왔어요 그것도 3년 계약으로.보통 평단과 관객 평을 참고해 1년 단위로 갱신하는데 놀라운 일이었죠.이후 '탄호이저'를 비롯해 2008년 '파르지팔'까지 베이스로서 중요한 배역은 다 했습니다. '탄호이저'의 헤르만 영주역 등 동양인이 하기 힘든 역을 도맡아 독일 동료들에게 부러움과 질투를 동시에 받았지요. 이렇게 중요한 역을 자기도 할 수 있는데 왜 당신이 계속 하게 되느냐고 말이죠."

이후 그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등 주요 오페라하우스의 초청을 받아 '세계에서 가장 바쁜 성악가'가 됐다.

음악적인 재능은 타고나는 것일까. 그는 처음엔 기대도 못했다고 말했다. "시골에서 농사 지으면서 학교 다녔는데 돈이 없으니까 충주공고로 진학했어요. 건축과였어요. 적성에 맞지 않았습니다. 졸업반 때 자격증 시험을 봤는데 반장인 저와 꼴찌하던 친구가 낙방했어요. 누구나 딸 수 있는 자격증인데….차라리 잘됐다 싶었습니다. 2학년 때 교내 음악경연대회에서 1등한 것을 떠올리며 노래를 해야겠다 생각했죠.3학년 때 음악선생님이 대학입시 준비할 시간이 없으니 작곡을 선택하라고 했는데 전 성악밖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10월까지 성악 선생님을 못 찾았어요. 석 달간 이탈리아와 독일 가곡 하나씩 연습해서 운 좋게 청주대 음악교육과에 들어갔습니다. "

그는 대학 졸업 후 군대까지 마치고 1990년 불가리아 소피아음대로 유학을 떠났다. 불가리아를 택한 것은 저음 가수들이 동구권에 많았기 때문이다.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를 추진할 때였다. 소련과는 수교가 되지 않은 상태였고 불가리아와는 수교가 돼있었다. 유명 성악가들이 불가리아에 많았다. 더 큰 매력은 동구권이 개방되면서 한 달에 100달러 정도면 생활할 수 있었기에 농사짓는 부모님께 덜 의지해도 됐다.

"다행히 좋은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원래는 1년 동안 불가리아어를 배운 뒤 노래공부를 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제 노래를 듣고 '넌 불가리아어 배우지 말고 바로 성악으로 들어가라'고 했죠.불가리아에서 승부할 게 아니라 더 큰 무대로 나가야 한다면서요. 보통 선생님은 잘하면 잡는데….1년 만에 끝내고 독일로 갔지요. 그때 베를린에 먼저 가 있던 여학생(나중에 결혼하게 될 성악가 박진하씨)에게 어디로 가면 좋겠느냐고 물었더니 독일로 오라는 거예요. 그래서 1991년 베를린국립음대에 들어갔습니다. "

그곳에서 공부하던 그는 1993년 플라시도 도밍고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도밍고로부터 "세계 오페라계의 떠오르는 보석"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몇 달 후 베를린 슈타츠오퍼국립오페라단에 입단한 그는 거기에서 다니엘 바렌보임을 만났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이 바렌보임이다. 그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데뷔한 것도 바렌보임 덕분이었다. 그는 2004년 독립할 때까지 10년간 베를린 국립오페라 전속 주역으로 활동했고 바이로이트의 단골 멤버로 이름을 날렸다.

작은 체구의 동양인이 어떻게 서양 오페라 무대를 주름잡을 수 있었을까. "무대에서 저는 극의 본질을 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들이 하는 해석과 전통적인 방식보다는 동양적인 관점으로 보죠.우리가 '춘향전'을 볼 때처럼 단순히 한 여자를 사랑하고 떠났다가 구해주는 등의 구성은 서양 오페라에도 많습니다. 설날에 외국인 노래자랑을 보면 외국사람이 우리나라 말 잘하는 게 신기하죠.그러나 우리가 느끼는 한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런 건 느낄 수 없잖아요. 제대로 하려면 '춘향전'과 관련된 과거제도,관기에 관한 것 등을 알고 접근해야 합니다. 제가 하는 역이 늙은 왕이나 제사장 등인데 서양인들의 제스처가 따로 있지요. 그런 것까지 다 분석하고 접근합니다. 관객들도 동양인보다 저의 캐릭터를 보는 거죠."

그에게 음악은 '심장의 맥박'이다. "음악은 살아가는 것,의식주 다음에 가장 필요한 요소죠.발걸음과 팔놀림도 다 박자가 됩니다. 박자에서 음악이 나오지요. 맥박 소리에서 음악이 시작됩니다. "

베이스는 무엇일까. "오케스트라에 악기가 많듯이 베이스도 다양합니다. 뱃속 깊이 내뿜는 게 있고 가벼운 것도 있죠.저는 낮고 높은 음역을 다 합니다. 이탈리아나 독일 오페라만 각각 하는 베이스가 있는데 저는 다 해요. 동양인의 한계를 넘는 거죠.베이스는 앙상블에서 주춧돌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할까요. 우리 몸의 척추뼈 같은 것이 곧 베이스입니다. "

그는 국내 공연 일정이 맞지 않지만 오페라를 자주 하고 싶다고 말했다. "'파우스트'와 '돈 카를로',아니면 바그너의 오페라를 하고 싶어요. '돈 카를로'는 사도세자와 비슷해 우리 정서에도 잘 맞습니다. 리골레토에 비해 베이스의 비중도 크고….국내에서 마지막으로 한 오페라가 2006년 예술의전당에서 한 '돈 조반니'였군요. "

만난사람=고두현 문화부장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