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갈등공화국'의 聖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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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레바논의 이슬람 군사조직인 헤즈볼라가 서방외교관과 언론인들에게 성탄 축하카드를 보냈다. 무장투쟁의 상징으로 AK-47 소총을 금빛으로 디자인한 조직 로고를 새긴 카드 표지에 '즐거운 성탄과 행복한 새해를 맞으시라(Merry Christmas & Happy New Year)'는 글귀를 적어 넣었다.
파이낸셜타임스 특파원이 헤즈볼라 대변인에게 전화를 걸어 카드를 보낸 까닭을 물었다. 대변인은 이렇게 되물었다. "동정녀 마리아의 아들 이사(Isa · 예수의 아랍어 발음)의 탄신일은 무슬림들에게도 큰 명절이다. 그 분의 탄신을 함께 축하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
그의 말처럼,무슬림들도 경전인 쿠란의 한 장(章)에 걸쳐 '성모' 마리아가 동정녀로 '이사'를 낳았다는 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할 정도로 예수 탄생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을 뿐,이슬람을 창시한 무하마드와 이브라힘(아브라함) 무사(모세)와 함께 마흐디(Mahdi · 구세주)로 숭앙한다. 기독교와 이슬람이 신정일치(神政一致)시대를 거치면서 회복하기 힘든 갈등의 나락에 빠져든 탓에 대립구도만 부각돼 왔을 뿐이다.
종교 갈등이 가장 치열해 '세계의 화약고'로 불리는 중동에서,그것도 과격 이슬람 군사단체가 서방 기독교인들을 향해 최소한의 공통분모를 상기시킨 것은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메시지를 던져준다. 그 메시지를 한국의 각계 지도자들도 함께 새길 것을 권한다.
지난해 삼성경제연구소는 반대집단에 대한 관용의 미흡과 불안정한 정당정치 등으로 인한 한국의 사회갈등지수를 0.71로 산출,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네 번째로 높은 것으로 분석했다.
이념 · 계층 · 지역 등 다양한 집단 간 갈등으로 인해 초래되는 사회적 비용이 연간 300조원에 이른다는 조사결과도 덧붙였다. 지난해 기준 한국 국내총생산(GDP) 1063조원의 30%에 육박하는 규모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이런 지적에 대해 "지나친 확대해석"이라며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올 한 해 벌어진 일들은 그런 반론을 무색하게 한다. 행정수도 분할과 4대강 공사를 놓고 달아오른 사회적 갈등은 대북(對北) 정책,무상급식과 '부자 감세' 등 국가정체성과 이념 · 계층 간 논쟁을 거쳐 종교 내부와 종교 간 얽히고설킨 논란으로까지 걷잡을 수 없는 확산일로를 치닫고 있다.
무엇보다도 걱정스러운 것은 사회 갈등의 최종 중재자 내지는 조정자 역할을 해야 할 종교계가 내분의 늪에 빠져 스스로의 방향타마저 잃을 위기에 빠졌다는 점이다. 불교와 개신교는 템플스테이 예산 등을 놓고 '종교전쟁'까지 언급할 정도의 격랑에 휩쓸려 있고,사회적 고비 때마다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해 온 가톨릭마저 사제들 간 분란으로 제 몸 가누기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 됐다.
이대로 가다간 세계의 각종 갈등구조가 한국 사회에서 모조리 현재화(顯在化)할 판이다. 저출산과 맞물려 이민자가 늘어나면서 인종 갈등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고,유럽 일부나 중동지역 국가들 같은 먼 나라 얘기로만 들렸던 종교 갈등까지 본격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압축성장기가 끝난 1990년대 초 계층 · 지역 간 갈등이 분출하기 시작하자 '내탓이오'의 사회적 대참회 운동을 펼쳤던 종교지도자가 그리워진다. 한국 사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건가.
이학영 편집국 부국장 haky@hankyung.com
파이낸셜타임스 특파원이 헤즈볼라 대변인에게 전화를 걸어 카드를 보낸 까닭을 물었다. 대변인은 이렇게 되물었다. "동정녀 마리아의 아들 이사(Isa · 예수의 아랍어 발음)의 탄신일은 무슬림들에게도 큰 명절이다. 그 분의 탄신을 함께 축하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
그의 말처럼,무슬림들도 경전인 쿠란의 한 장(章)에 걸쳐 '성모' 마리아가 동정녀로 '이사'를 낳았다는 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할 정도로 예수 탄생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을 뿐,이슬람을 창시한 무하마드와 이브라힘(아브라함) 무사(모세)와 함께 마흐디(Mahdi · 구세주)로 숭앙한다. 기독교와 이슬람이 신정일치(神政一致)시대를 거치면서 회복하기 힘든 갈등의 나락에 빠져든 탓에 대립구도만 부각돼 왔을 뿐이다.
종교 갈등이 가장 치열해 '세계의 화약고'로 불리는 중동에서,그것도 과격 이슬람 군사단체가 서방 기독교인들을 향해 최소한의 공통분모를 상기시킨 것은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메시지를 던져준다. 그 메시지를 한국의 각계 지도자들도 함께 새길 것을 권한다.
지난해 삼성경제연구소는 반대집단에 대한 관용의 미흡과 불안정한 정당정치 등으로 인한 한국의 사회갈등지수를 0.71로 산출,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네 번째로 높은 것으로 분석했다.
이념 · 계층 · 지역 등 다양한 집단 간 갈등으로 인해 초래되는 사회적 비용이 연간 300조원에 이른다는 조사결과도 덧붙였다. 지난해 기준 한국 국내총생산(GDP) 1063조원의 30%에 육박하는 규모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이런 지적에 대해 "지나친 확대해석"이라며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올 한 해 벌어진 일들은 그런 반론을 무색하게 한다. 행정수도 분할과 4대강 공사를 놓고 달아오른 사회적 갈등은 대북(對北) 정책,무상급식과 '부자 감세' 등 국가정체성과 이념 · 계층 간 논쟁을 거쳐 종교 내부와 종교 간 얽히고설킨 논란으로까지 걷잡을 수 없는 확산일로를 치닫고 있다.
무엇보다도 걱정스러운 것은 사회 갈등의 최종 중재자 내지는 조정자 역할을 해야 할 종교계가 내분의 늪에 빠져 스스로의 방향타마저 잃을 위기에 빠졌다는 점이다. 불교와 개신교는 템플스테이 예산 등을 놓고 '종교전쟁'까지 언급할 정도의 격랑에 휩쓸려 있고,사회적 고비 때마다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해 온 가톨릭마저 사제들 간 분란으로 제 몸 가누기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 됐다.
이대로 가다간 세계의 각종 갈등구조가 한국 사회에서 모조리 현재화(顯在化)할 판이다. 저출산과 맞물려 이민자가 늘어나면서 인종 갈등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고,유럽 일부나 중동지역 국가들 같은 먼 나라 얘기로만 들렸던 종교 갈등까지 본격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압축성장기가 끝난 1990년대 초 계층 · 지역 간 갈등이 분출하기 시작하자 '내탓이오'의 사회적 대참회 운동을 펼쳤던 종교지도자가 그리워진다. 한국 사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건가.
이학영 편집국 부국장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