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자에게 남는 건 차가운 시선과 침묵뿐이다. 제아무리 잘나가던 사람도 싸움에서 지고 나면 아무도 찾거나 말을 걸지 않는다. 천하의 스티브 잡스(55)도 예외일 수 없었다. 1985년 야심작 매킨토시가 죽을 쑤면서 자기 회사에서 사실상 해고된 뒤 잡스는 철저하게 버려졌다.

'사무실을 옮겨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나는 임원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회사에 도움이 되고 싶으니 일이 있으면 전화해 달라고 부탁했다. 다들 그러겠다고 했지만 한 사람도 전화하지 않았다. 새 사무실에서 내가 할 일은 없었다. 우울했다. 나는 결국 사무실에 나가는 걸 그만뒀다. '

스물두 살에 애플을 창업,승승장구하던 잡스의 인생 1막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그는 그러나 주저앉지 않았다. 정치에 입문할까 생각하던 그는 곧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은 새롭고 혁신적인 제품을 만드는 것임을 깨닫기에 이른다. 그리고는 명목만 유지하던 애플 회장직을 버리고 새 회사 '넥스트'를 창립했다.

잡스는 쉽사리 정의하기 힘든 인물이다. 태어난 즉시 입양된 사생아란 사실에 시달렸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오랫동안 친딸의 존재를 부인했다. 어려서는 독불장군이었고,성공 후 친구와 동료에게 주식을 나눠주지 않는 등 인색하게 굴었지만 필요한 사람은 무슨 수를 써서든 설득해냈고 직원 또한 항상 일류를 고집했다.

《아이콘,스티브 잡스》는 그런 잡스의 모습을 가감 없이 담아낸 책이다. 저자인 제프리 영과 윌리엄 사이먼은 고집쟁이 말썽꾸러기로 양부모를 괴롭혔던 잡스의 어린 시절부터 애플 창업 전후,픽사 성공 후 애플로 복귀, 아이팟 성공으로 세계 무대에 우뚝 선 2005년까지의 모습을 편집하지 않은 영상처럼 그려냈다.

책은 서른 살에 무대에서 떨어졌던 잡스가 어떻게 해서 쉰 살에 다시 무대에 올라 쉰다섯 살에 '디지털시대 최고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는지 보여준다. '그에겐 불가능에 대한 감이 없었다. 앞길에 도사리고 있을 함정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비전은 너무 강력해 어떤 장애물도 단숨에 날려버릴 정도였다. '

좋은 평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종잡을 수 없다. 공격적이고 독단적이다'와 '세세한 것에 너무 신경쓴다'도 있다. 분명한 건 그가 과거의 실패와 성공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제 막 시작한 사람처럼 행동함으로써 세상을 바꾸고 있다는 사실이다.

'쉰 살이 된다는 건 조금 더 멀리 내다볼 줄 안다는 것이다. 참을성이 많아지는 건 아니다. 어떤 질문을 받을지 더 잘 알게 될 뿐이다. 원하는 대로 일해주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니 일을 시키기 전에 내가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는 편이 낫다. ' 브리핑 문구까지 점검한다는 꼼꼼함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알려주는 대목이다.

잡스는 따라할 수도,무작정 따라해서도 안 될 듯한 인물이다. 그러나 잡스의 정신과 태도는 2000년대의 첫 10년을 보내고 새로운 10년을 맞이하는 지금 우리 모두의 가슴에 새겨둘 만하다. 첫째는 불가능은 없다고 믿는 도전정신이요,둘째는 누구라도 내편으로 만들어내는 끈기와 집념이요,셋째는 세상을 바꾸는 건 기술보다 소프트웨어가 지닌 가능성이라고 믿는 것이요,넷째는 우주에 흔적을 남기고 싶다는 의욕이다.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