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0월 어느 날.김인수 구주총괄 부사장(현 삼성탈레스 사장)에게 비보가 전해졌다. 영국 최고의 명문 축구구단인 첼시가 이미 새로운 후원사를 선정해 놓았다는 소식이었다. 상대는 세계 휴대폰 시장 1위 업체였다. 2002년부터 축구 마케팅에 공을 들여온 김 부사장으로선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1000억원을 뛰어넘는 후원금액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성사시키라"는 본사 주문이 내려온 지 겨우 하루 만의 일이었다. 삼성전자 영국 주재원들 사이에선 "이러다가 결국 들러리만 서 주고 물먹는 거 아니냐"며 발을 빼자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첼시는 삼성전자 구주총괄의 '만나서 이야기해보자'는 협상 제안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김 부사장은 포기할 수 없었다. 집요하게 첼시 측을 설득해 프레젠테이션 시간을 얻어냈다. 첫 협상테이블에 들고 나간 것은 애니콜 휴대폰.
"첼시에서 검토 중인 후원사가 유럽에선 강자인지 몰라도 삼성전자는 이미 세계 시장을 리드하고 있다. " 삼성전자의 설명이 시작되기도 전에 첼시 임원들 손엔 삼성전자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9부 능선은 넘었구나'란 안도감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휴대폰의 예상 밖 '선전'에도 불구하고 막판 협상후보에 오른 삼성전자 협상팀에 또 위기가 왔다. 러시아 출신의 첼시 임원이 삼성전자와 계약 체결에 등을 돌리면서 분위기가 경쟁사로 반전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첼시는 영국 중상류 계층이 거주하는 런던 풀햄을 연고지로 둔 최강의 축구클럽이었다. 공교롭게도 삼성의 색깔인 파란색을 떠올릴 수 있는 '더 블루스(The Blues)'란 애칭마저 쓰고 있어 첼시 후원은 포기할 수 없었다.
마지막 협상테이블.김 부사장은 계약포기 상황까지 검토한 뒤 자리에 앉았다. 긴 프레젠테이션이 이어졌다. 피터 케니언 첼시 사장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발표를 마친 김 부사장은 자리를 뜨면서 준비해둔 한마디를 던졌다. "세상을 파랗게 만들어 봅시다(Turn the World Blue)!" 순간 첼시 사장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다음 날 아침.김 부사장은 삼성이 첼시의 파트너로 선정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김현예 기자 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