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속보] 수십년간 삼성전자의 별칭은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였다.

이미 형성된 시장에 뒤늦게 뛰어들어 선진업체들을 따라잡는 방식으로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왔다.수많은 기업들도 이런 도전에 나섰지만 삼성전자만큼 성공한 회사는 찾아보기 힘들다.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바로 속도였다.이병철도 그랬고 이건희도 그랬다.속도의 광신도들이었다.전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속도경영의 신화는 1983년 시작됐다.

◆6개월의 기적

1983년 어느날.이병철 회장의 방을 나오는 삼성석유화학 성평건 소장의 얼굴은 창백했다.회장의 무모한 지시때문이었다.갑자기 호출을 하더니 “자네가 기흥반도체 건설본부장을 맡아주게,6개월 시간을 줄테니 반도체 공장을 완공하라”고 말하는 것 아닌가.

성 소장의 머릿속은 복잡했다.‘선진국에서도 1년6개월은 족히 걸린다.반도체공장은 처음 지어보는 것이다.여기에 부지로 선정된 기흥은 야산과 잡초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찌하겠는가.성 소장은 반도체 공장 건설본부 전직원을 불러모았다.그리고 “회장님은 무모할 정도의 목표인 6개월을 제시했다.우리는 지금 기적을 이뤄내야 한다”고 말하고 공사에 들어갔다.

이 회장이 무모한 지시를 내린데는 이유가 있었다.1983년은 64K D램이 없어서 못팔때였다.이왕 반도체시장에 진출하기로 한 것인데 호황이 략나기 전에 진입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모두 불가능하다고 말했다.하지만 이병철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모든 일을 동시에 진행하라.

삼성은 이를 ‘동기화(同期化) 전략’이라 부른다.

일반 건설공사는 릴레이처럼 진행된다.한 공정이 끝나면 다음 공정으로 넘어간다.그러나 삼성의 선택은 모든 공정을 동시에 진행하는 것이었다.단 한명도 낙오하지 않으면 공사기간을 단축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기공식 직후 전쟁이 시작됐다.1라인과 골조공사가 시작됐다.전기와 물 공급을 위한 공사도 동시에 들어갔다.이는 하드웨어적 측면이었다.이병철 회장의 또다른 승부수는 사람이었다.그는 미래의 엔지니어로 뽑은 신입사원들 수십명을 추렸다.그리고 설비를 담당할 사람을 차출했다.그리고 이들은 설비 발주처인 업체로 파견을 보냈다.

많은 사람들은 “신입사원들이 뭘 할수 있겠냐”며 웅성거렸다.하지만 수개월후 이병철의 전략은 빛을 발했다.설비업체 현장에서 제작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이들은 불과 수개월만에 훌륭한 설비 엔지니어가 됐다.장비 설치부터 테스트,응급처치까지 이들에게는 별도의 교육이 필요없었다.최소한 수개월은 단축한 프로그램이었다.

삼성인들의 만들어낸 기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자갈길 통과가 불가능한 특수장비를 들여오기 위해 불과 반나절 만에 4km에 이르는 포장도로를 만들었다.안정된 전기를 공급받기 위해서 기흥공장만을 위한 철탑을 세운 것은 물론이다.물 문제는 수원공장의 물을 파이프로 끌어오는 것으로 해결했다.이 모든일들을 동시에 진행했다.

감히 쳐다볼수 없을 것 같았던 일본의 거함들을 하나 하나 침몰시킨 삼성 반도체호의 신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김용준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