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앨범을 정리하기 위해 집에 있는 앨범을 모두 찾아 모아 보니 정확하게 52권이다. 앨범 속의 사진이 몇 장인지 일일이 세어 볼 수는 없지만 어림잡아 4000장은 될 듯하다.

사진 중에는 어릴 적 까까머리를 하고 초등학교 동창들과 찍은 것,가족들과 촬영한 것,해병대 청룡부대 소대장으로서 월남에서 찍은 빛 바랜 흑백사진도 꽤 있다. 10여년 전 해병대 사령관 당시 위풍당당했던 모습의 컬러사진을 보니 괜스레 뿌듯한 추억에 젖기도 한다. 앨범 정리는 아버지이자 남편으로서,그리고 할아버지로서 70년 가까운 세월을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가족들에게 알려 주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했다. 지금은 세계적인 조선소로 변해 자취를 찾아볼 수 없는 고향 거제도의 풍경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사진도 있고,매일매일이 삶과 죽음의 문턱에 걸쳐 있던 월남전에서 소총을 들고 행군하는 사진도 있다.

사진 정리는 곧 추억의 정리다. 이를 통해 새삼 느끼는 것은 가족의 소중함이다. 아내는 서너 장 걸러 한 번씩 얼굴을 내밀고,언제나 어리게만 느껴졌던 세 아들 녀석도 이젠 중년이 돼 아주 다른 모습을 나에게 비춰준다.

그래도 넘길 때마다 아름다워지는 아내와 아들의 성장 과정을 보니 '나의 삶은 혼자 산 것이 아니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가족이 항상 옆에서 제자리를 지키고 나를 지원해 주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음을 새삼 느낀다. 사진 속의 지인들 소식이 문득 궁금해 연락처를 수소문한 경우도 있다. 이들 또한 오늘까지 내가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이다.

좋은 추억이든 나쁜 추억이든 서로 사진에 정지된 그 순간을 공유한다는 것은 생각해 보면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문득 걱정도 된다. 대부분의 추억은 시간이 지나면 현실보다는 조금 더 아름답게 포장돼 기억에 저장되는데,디지털로 변환되면 추억도 0과 1의 신호로 저장돼 감동이 줄어들지 않을까? DVD로 사진을 저장해 PC 모니터나 TV 화면으로 보면 과연 아날로그 시절을 실감나게 설명할 수 있을까?하루빨리 디지털로 바꾸라고 떠들고 다녀도 시원찮을 전력IT 회사 사장이 이런 걱정을 하는 것이 조금 이상하기는 하다.

끝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했던가?세밑에 앨범을 정리하고 나니 새해 첫날이 왠지 모르게 상쾌하고 행복하다. 무엇이든지 때가 되면 보내고 내려 놓아야 한다.

꼭 앨범이 아니더라도 오늘은 사무실이나 탁자 위를 정리하는 것도 좋겠다. 지난해부터 가지고 있던 수첩부터 2011년도 수첩으로 바꾸자.마음도 청결하고 긍정적으로 바꿔보자.안 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모든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을 바꿔보자.단 친구와 술은 묵을수록 좋으니 바꾸지 말자.

전도봉 < 한전KDN 사장 ceo@kd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