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세계 경찰국가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세계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시작한 이후 이런 현상이 뚜렷해지는 양상이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1기 집권 때만 해도 자유 수호(freedom agenda) 역할을 강조했다. 하지만 2기 들어선 이라크와의 전쟁 부담이 커지면서 동력을 잃었다. 특히 관타나모 수용소 문제 등이 불거지면서 미국은 더 이상 인권을 외치기조차 낯 뜨겁게 됐다. 북한과 이란 문제를 다루면서도 이념보다는 '현실정치(realpolitik)'논리에 치우쳤다. 오바마 정부 들어서도 세계 자유 수호 전략에는 이렇다 할 변화가 감지되지 않고 있다. 적극적인 개입보다는 관찰자로서의 역할에 머무르려는 태도다.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등 북한의 도발도 이런 와중에 빚어진 것이다. 관찰자가 흔히 하는 말이 '전략적 인내력'이다. 한반도 전문가인 찰스 암스트롱 컬럼비아대 교수는 "미국이 북한 문제를 다루는 데 전략적 인내력을 강조하는 것은 (뚜렷한 전략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비정부 인권 옹호단체인 '프리덤 하우스'는 최근 4년 연속 더 많은 국가에서 시민권이 후퇴했다고 분석했다.

민주주의를 확산시키고 세계 질서를 유지하겠다는 미국의 의지가 약해질수록 더 바빠지는 사람이 있다. 바로 유엔을 이끌고 있는 반기문 사무총장이다. 유엔은 작년 말부터 서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에서 민주주의 수호자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유엔은 작년 11월28일 치러진 코트디부아르 대선에서 알라산 와타라 전 총리가 54%의 표를 얻어 승리했다고 공식 선언했다. 하지만 로랑 그바그보 현 대통령이 대선 결과에 불복하면서 상황이 꼬였다. 그바그보 대통령은 "자신이 권력을 유지하지 않으면 자신의 지지세력이 내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정권연장을 꾀하고 있다.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ECOWAS)가 군사작전을 언급하면서 퇴진 압력을 넣고 있지만 결과를 낙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하지만 권력을 장악한 이들이 마음대로 못한다는 사실을 온 천하에 알리기 위해서라도 선거 결과를 관철시키겠다는 게 반 총장의 의지다. 현지에 머물고 있는 최영진 유엔 코트디부아르 특별대표에게 아프리카에서 다시는 선거불복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가능한 수단을 동원해 그바그보의 퇴진을 이끌어낼 것을 지시한 것도 같은 취지다.

반 총장은 수단 다르푸르 내전과 그에 따른 인권 문제에도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 오는 9일 남부 수단인들은 남북 분리안을 놓고 선거를 치르게 된다. 수단은 현재 이슬람계인 정부가 북부를,기독교계가 주축이 된 반군 '수단인민해방운동(SPLA)'이 남부를 각각 장악하고 있다.

반 총장은 미얀마의 민주화를 위해서도 집권세력에 목소리를 높여왔다. 16일 있을 아이티 대선 결선투표가 민주적으로 치러질지도 걱정이다. 한반도 평화,이란 핵무기 문제를 비롯해 소말리아 정권 수립 등도 고민거리다.

전쟁과 경제난으로 세력이 약화되고 있는 미국을 대신해 세계 민주주의를 확산시키기 위해선 반 총장의 리더십이 중요하다. 리더십 없이는 제한된 자원으로 세계 각지의 민권을 신장시킬 수 없다. 필요하면 미국의 협조도 이끌어내야 한다. 때론 독재자를 윽박지르기도 해야 한다. 올해는 특히 반 총장의 5년 임기 마지막 해다. 부드럽지만 단호한 리더십으로 박수를 받으며 재임하길 기대해본다.

뉴욕=이익원 특파원 i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