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는 시장의 질서를 지키는 파수꾼이다. 부(部)나 청(廳)이 아닌 '위원회'조직으로 둔 것은 '누가 권력을 잡든 관계없이 정해진 규칙에 따라 시장을 지키라'는 취지를 담고 있다. 독과점을 경계하고 시장 경쟁을 촉진하는 것이 공정거래법에 담긴 설립 목표다.

하지만 한국에서 공정위는 '권력자의 칼'이다. 누가 정권을 잡느냐에 따라 공정위 색깔이 카멜레온처럼 바뀌었다. 김영삼 정부 때까지만 해도 경쟁 촉진이 주업무였으나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경제력 집중 억제에 매달렸다.

이명박 대통령이 들어선 뒤에는 공정위의 역할이 더욱 변화무쌍해졌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내건 집권 초에는 '시장친화적인 경쟁질서 확립'을 내세우더니,이후 '공정사회와 동반성장'을 추구하는 집단으로 바뀌었고,올해 들어서는 '물가기관'으로 탈바꿈하겠다고 선언했다. 불과 3년여 만에 공정위의 정책 목표가 세번이나 바뀐 것이다. 이로 인해 공정위 정책의 일관성이 떨어져 기업 활동에 불확실성도 커지고 있다.


◆'비즈니스 프렌들리'

공정위원장의 임기는 법적으로 3년이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 임기를 모두 마친 사람은 없다. 지난 3년 동안 공정위원장에 임명된 사람은 3명이다.

이명박 정부의 첫 공정거래위원장이었던 백용호 위원장은 1년4개월 일한 뒤 국세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뒤를 이어 성균관대 법대 교수였던 정호열 공정위원장이 임명됐으나 1년5개월만에 김동수 위원장으로 교체됐다. 물러난 두명 모두 위원장 임기의 절반을 넘기지 못했다.

백 전 위원장은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강조한 이명박 정부의 코드에 맞춰 ‘기업규제 완화를 통한 시장활력 제고’를 정책방향으로 제시했다. 그는 취임사에서 “진입제한ㆍ가격규제ㆍ영업활동 제한 등 경쟁을 저해하는 정부 규제를 완화해 시장친화적인 환경을 조성하고 경제를 활성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백 전 위원장은 2009년 3월 대기업 규제책으로 평가받던 ‘출자총액제한제도’를 폐지했다. 또 기업의 인수ㆍ합병(M&A) 심사를 최대한 빨리 진행해 기업의 부담을 줄여줬다.

◆'공정사회와 동반성장'

정 전 위원장은 취임 직후 ‘시장경제의 파수꾼’을 자처했으나 지난해 초부터 이 대통령이 ‘공정사회’를 정부 화두로 제시하자 ‘대ㆍ중소기업 동반성장’의 전도사로 나섰다. 정 전 위원장은 중소기업 현장을 방문해 “경기회복 이후 대기업이 사상 최대의 이익을 거두고 있지만 그 온기가 중소기업까지 확산되고 있지 않다”며 “하도급 거래의 관행을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대 · 중소기업 동반성장 대책으로 하도급법의 적용대상을 2,3차 협력업체까지 확대해 장기어음 거래를 금지하는 방안,원자재 가격 인상분을 반영할 수 있도록 납품단가 조정 협의제도를 활성화하는 방안 등을 내놓았다. 정 위전 원장은 대통령이 강조했던 대 · 중소기업 동반성장에 앞장 섰던 공로를 인정받아 연임될 것으로 예상됐으나 연말 개각에 전격 교체됐다.

◆'물가안정 기관'

신임 김 위원장은 연초 취임사에서 "물가 등 거시경제적 문제에 대해 선제적으로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물가안정'을 최우선 정책목표로 제시했다. 물가관리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고 조직과 인원을 물가안정 총력체제로 전환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이같은 공정위의 목표 변화에 대해 경쟁법 전문가는 "이명박 대통령이 연초 '5% 경제성장과 3% 물가상승률'을 새해 경제목표로 제시하면서 각 부처가 충성 경쟁을 벌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공정위가 물가를 잡기 위한 직접적인 정책수단이 없는데도 물가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다는 것이다.

◆독립성과 전문성 훼손 우려

권력자의 의지에 따라 공정위원장이 바뀌고 정책목표가 뒤집히는 상황에서 ‘경쟁촉진’이라는 본연의 임무는 퇴색될 수 밖에 없다. 허선 법무법인 화우 선임컨설턴트는 “법으로 보장된 3년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위원장이 자주 교체되고 정책목표가 수시로 변하는 것은 법이 보장하고 있는 공정거래위원회의 독립성을 크게 훼손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위원장의 전문성에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공정위가 외부의 압력에서 독립성을 지키려면 위원장의 전문성이 필요한데, 경쟁법 분야에서 비전문가가 위원장으로 임명되고 있다는 것이다. 백 전 위원장은 경제학 박사로 금융분야의 전문가며,김 신임 위원장은 재정경제부에서 생활물가 과장과 물가정책과장 차관보를 지낸 물가통이다.

정치적 외압이나 산업계의 로비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지않도록 법에서 정한 임기를 보장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김영삼 정부의 마지막해인 1997년에 임명된 전윤철 공정위원장과 이남기 위원장과 강철규 위원장이 3년 임기를 모두 마쳤다.

◆선진국선 법개정 거의 없어

시장경제가 잘 정착된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공정거래법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경쟁법'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돼 있다. 시장의 규칙인 경쟁법에 '가치관이 담긴 정책 목표'를 부여해서는 안된다는 공감대가 광범위하게 형성돼 있다.

미국에서 담합과 독과점 행위를 금지한 셔먼법은 120년 전인 1890년에 제정됐다. 경쟁제한적인 기업결합과 가격차별행위 등을 금지한 클레이튼법과 미국의 경쟁당국 설립 근거법인 연방거래위원회(FTC)법은 1914년에 제정됐다. 미국 정부는 새로운 기업 형태가 등장하는 것에 맞춰 법의 해석을 확장해왔을 뿐 큰 틀을 흔드는 법 개정은 하지 않았다.

미국에서 경쟁법을 전공한 공정위 관계자는 "영미법의 특성상 축적된 판례에 따라 법을 해석하고 집행하는 방식"이라며 "정부의 정책목표에 따라 법 집행의 방향이 바뀌는 경우는 없다"고 말했다.

서기열 기자 philos@hankyung.com